타자에서 내가 되는 순간─이성복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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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97회 작성일 18-03-26 03:05본문
타자에서 내가 되는 순간
─이성복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기혁
1. 오독
당신이 태어나 출생기록을 작성 당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네이션에 소속된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앞으로 당신의 이력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함부로 기록된다. 당신이 오늘 먹은 커피의 종류처럼 사소한 것부터, 당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당신이 네이션에 대한 (어쩌면 강요된)보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영원히 보호의 대상으로써 감시받게 된다. 당신, 그리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일부로 작동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며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공동체를 ‘나’와 타자의 집합이라고 간단히(모독적으로) 정의한다면, 세계는 ‘나’와 타자라는 이분법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유의 갈망이 타자의 영향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이라면, 자유롭고 싶다는 마음 또한 타자에 의한 또 하나의 관습이다. 만약 당신이 자유를 쟁취하게 된다면, 당신은 새로운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타자가 존재하는 한 당신은 타자를 멋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며, 무심코 타자에게 영향 받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생각하는 주체는 ‘나’밖에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타자를 ‘나’에게 편입시키려는 방어기제를 취하게 된다.
이성복은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서 ‘나’가 타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받으며, 또 타자를 어떻게 오독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타자성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며, 불안심리로써 타자성을 설명하고 있다. 90년대 문학을 설명할 때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논하지 않는 건 90년대 문학에 대한 오독을 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인상비평으로서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하 두 권의 시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2. 갈망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금기」 부분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인지, ‘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이 ‘나’의 금기라면, ‘당신’은 ‘나’로부터 검열될 수 없는 대상이다. ‘당신’에 대한 오독이 인정받을 수 없는 가운데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도 “홀로 자유”롭다. 그러나 ‘당신’은 ‘금기’임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영향으로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오독될 수 없으면서도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는다.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이성복은 이런 타자의 영향성을 “얼룩이 지고 비틀려”/“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느낌」) 고 설명한다. 타자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며, 그 고정성에서 어떠한 폭력적인 은유를 읽을 수도 있다. 다시 폭력성은 결국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갈망으로도 변주될 수 있다. 타자는 멋대로 “저희 집 지붕 위에 드리우”고, ‘나’에게 타자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한다. “나는 두 개의 꽃나무 다 갖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뜰에 심고 다른 하나는 문 앞에 두고 싶었습니다”(「두 개의 꽃나무」) 라며, ‘나’의 정원에 ‘꽃나무’가 침입해 버리기를 허용한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 여름의 끝」 전문
‘나’는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백일홍’ 나무에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단다. 이성복의 쓰러지지 않는 나무에 대한 갈망은 시적인 정경이 되어 「그 여름의 끝」에 묘사된다.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고, ‘폭풍의 한가운데’는 곧 ‘나’의 ‘절망’이다. 하지만 ‘붉은 꽃’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붉은 꽃’이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백일홍’ 나무는 넘어진다. “붉은 꽃”이 절망한 ‘나’와는 달리 “홀로 자유로운” 타자라면,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비로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이 난다. 갈망이란, 타자에 대한 갈망인지, 혹은 타자의 영향력에 대한 갈망인지. 어쨌거나 타자의 피로서 ‘나’의 절망은 끝이 난다.
3. 절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시인의 말을 첨부한다.
더 이상 붙들곳 있어 나아질 것이 없을듯해서, 지난 이태 동안 끄적인 것들을 묶어 세상에 부친다. 얼핏 글에 대한 입맛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나, 글로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너무 오랫동안 삶을 무시해왔다.
─「自序」 전문
시인은 「自序」에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너무 오랫동안 삶을 무시해왔다.” 고 전한다. 우리는 쉽게 타자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사랑의 통속성은 무반성적인 인식을 동반한다. 시인은 뒤표지에서 “전적인 사랑의 자기 증식”이라고 설명한다. 조사 ‘의’를 배제하고서라도 ‘자기 증식’에 밑줄을 긋는다. 사랑이 ‘자기 증식’이라면 사랑은 타자를 향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나’의 심리적 보신을 위한 방어기제일 뿐인가.
흐린 봄날에 연둣빛 싹이 돋는다 애기 손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아파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놓고 수건 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나무 이름, 오랫동안 너는 어디 가 있었던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부분
‘싹’의 속성에 대해 생각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경험적으로 ‘싹’을 희망과 성장 같은 속성으로 기억해왔다. 근데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서는 “애기 손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고 말한다. “아파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놓고 수건 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태어나는 생명에 대해 ‘나’는 ‘죽음’을 인식한다. “호랑가시나무,/오랫동안 너는 어디 가 있었던가.” 라지만, 이는 단지 ‘나’의 감상적인 탄성이 아니라, 절망의 재인식에 대한 슬픈 탄회는 아닐까.
나방이 한 마리 벽에 붙어 힘을 못 쓰네 방바닥으로 머리를 향하고 수직으로 붙어 숨 떨어지기를 기다리네
(중략)
노란 가루가 묻은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슬프지 않아라, 슬프지 않아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부분
‘나방’은 단지 “죽음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슬프지 않”다. 다만 과연 “슬프지 않아라” 가 텍스트 그대로의 의미인가? “슬프지 않아라” 는 자신이 슬프지 않기 위해, 혹은 타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주술적인 주문으로도 읽힌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에 대해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를 갈망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기에 절망하는 현실이 싫다고, ‘나’의 무의식이 ‘나방’에게 소리치고 있다.
앞서 『그 여름의 끝』의 갈망의 형태는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서 절망으로 귀결된다. 두 시집의 3년간의 여백 동안 시인은 어떻게 변했는가.
가난한 죽음에는 화환도 음악도 없다
그저 장식되지 않은 슬픔이다
고인의 영정 위에 내리는 비는
웃고 있는 고인을 찡그리게 만든다
음악도 화환도 없는 영결식에
아버지, 아버지! 라고 되뇌이는
─「죽음」 부분
“가난한 죽음에는 화환도 음악도 없다”. 죽음은 단지 몸이 죽는, 유물론적인 형태의 죽음이 아니라 “그저 장식되지 않는 슬픔이다”. 타자에 대한 노력으로도 결국 오독으로 밖에 그칠 수 없는 슬픔에 대한 회의로도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는 읽힌다.
4. 다시 오독을 위해
당신은 관습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끝없는 자기 인식을 통해 깨닫게 된다. 당신을 결국 타자에 대한 오독 그 자체를 선택하게 된다. 오독의 과정 속에서 자신조차 오독된다는 슬픔도 깨닫게 된다.
이성복의 공동체적인 허무 속에서 실존의 파편을 읽는다. ‘나’가 타자를 오독하는 가운데, ‘나’는 자꾸만 타자를 ‘나’에게 편입시킨다. 이것이 ‘나’의 주체성에 대한 방어기제라는 것도 알게 되겠지만, 이 무한량의 사유에 대해 기권을 선언한다. 기권은 단지 ‘타자성’에 대해 등을 돌리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회의와 회의를 통한 자기 인정을 뜻할 수 있겠다. 끝없이 오독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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