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무덤 / 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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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40회 작성일 18-08-21 11:18본문
이불무덤 / 천수호
우리 집 이불 속 역사는 약사(略史)로만 전해진다
저 속에서 얼마나 자주 아이를 잉태했었는지도
저걸 덮고 큰언니가 죽어나간 일도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간단한 엄마의 말로 요약되어
가끔 끙, 하는 신음 속에만 묻어나올 뿐
완전한 진실은 다 묻혔다
어린 내 발등에 차인 아버지 밥그릇이 두어 번 발라당 넘어졌어도
아버지는 묵묵히 머리카락을 떼고 밥그릇을 다 비우셨고
스테인리스 밥그릇의 절절 끓는 온기가 내 발끝을 자주 녹았다는 것도
묵인된 역사였다
누구 발등인지 모를 매끈한 살결에
은근히 발을 잇대기도 했고
그 촉감만큼 매끄러운 눈물도 이불속에서는 잘 묻혔다
부화된 아이들은 무럭무럭 그 이불 속에서 자랐고
이불 속으로 도저히 두 발을 숨길 수 없을 때는
하나씩 집을 떠나갔다
하얀 목화솜이 따글따글 씨앗처럼 여물어졌어도
이불은 아직 색동무늬 밑에 그 뼈다귀들을 묻어놓고 있다
鵲巢感想文
2018년 8월 20일 긴긴 이별 끝에 오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에 한민족 두 체제 하에 기나긴 생이별이었다. 아버지가 딸을 보고 언니가 동생을 보았다. 가족이 이렇게 두 눈 뜨고 갈 수 없었던 서로의 금란 지역에 어찌 살았는지 기나긴 세월만 보아도 눈물이었다.
가족은 모두 한 이불속에서 자랐다. 지금 현재의 가족이 있기까지 우리 모두는 약사(略史)나 다름없다. 우리 국민의 하나하나가 모여 국가를 이루었듯이 우리의 하나하나가 모여 문단을 이루었다.
부화된 아이들은 무럭무럭 그 이불속에서 자랐고 이불속으로 도저히 두 발을 숨길 수 없을 때는 하나씩 집을 떠나갔다.
얼마 전에 읽은 신문기사였다. 소설가 김 씨의 글은 지금 우리 문단의 현주소를 얘기했다. 우리나라에서 인세(책이 한 권 팔릴 때 그 책값의 10%가 작가의 몫이다)와 원고료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작가는 스무 명이 채 안 된다. 유명한 작가도 글세(인세+원고료)보다 부가수입(원작료, 강연료, 심사료, 출연료 같은)이 더 크다.
대개 작가는 따로 직업이 있다. 글과 가깝고 안정적으로 글을 쓸 환경이 되는 직업이 압도적이다. 가령 교수, 교사, 언론인, 공무원, 법조계 종사자......하지만 그 환경 그 조건에서 왜 글을 쓰는지 이해가 안 되는, 육체적으로 혹독한 직업에서부터 재벌까지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다. 작가 자신이 직업이 없다면 배우자가 있다. 김 씨의 말이다.
문자는 유사 이래 특권계층만이 소유했다. 세종대왕께서 서민이 읽을 수 있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지만, 이 글을 보편적으로 쓰기까지는 약 500년 가까이 걸렸다. 이 글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1950년 대였다. 그러고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등단자이거나 일부 권력자와 상류층이었다.
90년 중반의 인터넷 혁명은 일개 개인도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를 만들었다. 누구나 시를 쓰고 발표하며 누구나 또 그 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은 한마디로 누구나 작가를 만들었다. 또 다른 이불을 보고 있는 셈이다. 하얀 목화솜이 따글따글 익는 씨앗처럼 곳곳 날아가 심는 소리가 난다. 색동무늬가 펼쳐지고 그 이불속에는 뼈다귀가 고스란히 묻어가는
우리 민족의 숨소리가 오늘도 원기 왕성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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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1964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
매일신문 춘추칼럼 글 소설가 김종광 ‘작가와 글쓰기의 자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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