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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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64회 작성일 18-09-10 22:27본문
페루 / 김상미
다시 태어난다면 페루가 좋겠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멋진 소설도 있듯이
그곳은 죽기에 딱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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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은 어디든 꼭꼭 숨어 있자.
큰놈들은 큰놈들끼리 어울려 언제나 잘도 도망치고 도망치다
북두칠성처럼 어김없이 제자리로 돌아와
갈 곳 없는 작은 놈들을 또 잡아먹고, 잡아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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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는 놀랄 것도 없는 이곳.
내 아버지가 울고, 내 어머니가 울고,
내 형제, 내 아들딸들이 우는 이곳.
그러나 나는 결코 울고 싶지 않은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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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만 이곳에 꼭꼭 숨어 있자.
모든 새들이 떠나고, 미지의 새들마저 다 떠나고 나면
간신히 붙잡고 있던 누군가의 마지막 팔을 흔쾌히 놓고
달콤한 새들의 눈물이 너무나도 그리워 목이 마른 숲의 맥박이
점점 느려지다 딱 멈출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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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엔 재빠르게 침실 서랍장 위에 놓아둔 페루의 사진을 가방에 넣고
오래전에 내가 묻혀 있던 그곳으로 떠나자.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든 훌쩍 떠나는 방식은 이미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터득한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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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페루가 좋겠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멋진 소설도 있듯이
페루는 죽기에 딱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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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치도록 사랑한 한 남자도
막다른 그 길 위에서 한 번도 내가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처럼
그렇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鵲巢感想文
페루는 하나의 이상이다. 굳이 국가를 자청하여 어떤 설명을 추론할 필요는 없겠다. 이 詩를 읽고 있으면 현실 도피적인 데가 없지 않아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詩人 김상용의 詩가 생각나게 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시인은 오로지 자연과 더불어 초탈한 삶을 원했다.
위 시 또한 퐉퐉한 현실을 떠나 시인만이 가지는 어떤 동경을 그린다. 그곳은 큰 놈들은 큰 놈들끼리 어울려 언제나 잘도 도망치고 도망치다 북두칠성처럼 어김없이 제자리로 돌아와 갈 곳 없는 작은놈들을 또 잡아먹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관을 탈피하고 그 어떤 감정과 숨이 끊긴 곳
모든 새들은 떠나고 미지의 새들마저 다 떠나고 나면 간신히 붙잡고 있던 누군가의 마지막 팔을 흔쾌히 놓을 수 있는 마른 숲의 정지된 풍경만 있는 곳
그러니까,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든 훌쩍 떠나는 방식,
정말 페루라는 곳은 있는가?
내가 미치도록 사랑한 시도 막다른 그 길 위에서 존재하며 한 번도 그 시인은 만난 적 없고 그의 얼굴은 더욱 본 적 없지만, 낯선 사람처럼 그렇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어제 일기에 올린 詩였다.
士卒傳呼班馬路 相公坐對燭龍枝 夜久淸光如可掬 一天星斗影宮池 큰길로 말이 돌아간다 사졸들이 외칠 때, 상공은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마주하고 계시네. 밤 깊어 환한 달빛 손에 잡힐 듯 비치고, 온 하늘에 별들은 궁궐 연못에 쏟아지네.
구당榘堂 유길준의 시였다. 궐내 위급한 상황을 보고 즉시 지은 시였다고 한다. 이 시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무장해제한 뒤에 물러나는 한 장면을 묘사한다.
당시 지식인으로서 외세의 침략에 우리 왕조는 그 어떤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 큰길로 말이 돌아간다는 것은 일본군을 지칭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유길준은 만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당대 유명 지식인이다. 그는 떠났지만, 막다른 길 위에서 이 천한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詩 페루는 시인을 만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으나 마음은 고스란히 전하여 내게로 왔다. 소득주도 성장인지 세금 주도 성장인지, 오늘은 대통령 비석 실장까지 나서서 이상한 얘기(국회의장단 및 여야 대표 평양회담 초청)를 하는 이 나라에서 어쩌면 훌 떠나고 싶은 마음을
어쩌면 이리 시원히 표현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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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부산에서 출생 작가세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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