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 / 강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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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31회 작성일 18-11-26 06:55본문
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 / 강미정
부피를 가지지 않고도 묵직한 것들은 온다
해가 지고 저녁이 올 때,
병 깊은 여자가 옥상 난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볼 때
역광으로 빛나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옥상 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멈추고 서서 지켜볼 때
둘 다 눈물 괸 눈빛일 때,
빛이 사라지면 윤곽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나의 무엇이 사라지는가
가장 가까운 곳부터 모두 지우고 마지막 하나
검은 잉크로 쓴 분홍 문장을 당신이 보여줄 때
그 분홍 문장으로 반짝거렸던 내 말과
흥얼거리던 내 노래를 잃고 입술을 닫은 나에게도
뭔가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오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시간이 다 지나가서
먼 곳이 지워지고 점점 가까운 곳도 지워져
검은 잉크로 썼던 분홍 문장에 엎지러진 먹물,
당신은 몇 겹의 무늬로 오는가
이 밤은 또 몇 겹의 무늬로 깊어지는가
지우고 싶지 않은 분홍 문장만 무한대로 열려
먹물을 먹인 붓을 들고 달빛이 분홍 문장을 탁본한다
* 강미정 : 1962년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타오르는 생>등 다수
< 감 상 >
부피 없이도 묵직한 것은 해가 지고 저녁이 오므로 어둠일 것이고,
병 깊은 여자가 옥상 난간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난간을 오르던 남자가
역광의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어둠 같은 슬픔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처럼 당신이 죽으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렸다
당신과 다복 했던 지난날들이 하나 하나 지워지고 마지막 하나 검은 잉크
로 쓴 분홍 문장만을 보여준다는 뜻은,
당신은 나에게서 나는 당신에게서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강한 情念의
불길이 몇 겹의 무늬로 활, 활, 타오르고 있다는 뜻 같기도 한데?
화자의 속내를 좀처럼 가름하기는 어려우나, 네러티브의 흐름이 황금 잉어
유영하는 모습처럼 웅숭깊고 화려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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