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 김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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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087회 작성일 19-01-07 17:39본문
황혼
김점용
어머니는 자꾸 숨겼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
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
호미를 숨기고 얻어 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
선산에 묻은 아버지를 숨기고
부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막내이모를 일본 대마도에 숨겼다가
우리에게 들키자 다시 내 여동생 속에 꼭꼭 숨겼다
하루는 멀쩡한 우리 집을 숨겼다가 경찰차를 타고 들어오더니
자신의 머리카락과 옷을 가위 속에 가스렌지 속에 숨겼다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 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월간문학』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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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자꾸 무엇을 숨기신다. 자기 것인데 혹여 누가 가져갈 까 두려운 것이다. 처음에는 돈을 숨기더니 새 신발과 시금치 씨와 호미를 숨기신다. 조금씩 증세가 심각해진다. 아마도 어머니는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뺏기고 사셨나 보다. 그러다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빨래 건조대까지 숨긴다. 이쯤 되니 숨기는 일이 비정상이고 병적이다. 갑자기 날씨가 우울해지고 행간에 긴 그림자가 깔린다.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신 것이다. 이미 죽은 아버지를 찾고 여동생을 보고 이모라 부르는 어머니는 ‘사실’마저 숨기고 부정한다. 가출하여 길을 잃고 경찰차를 타고 오거나 기이한 행동을 수시로 하던 어머니는 마침내 자신마저 꼭꼭 숨겼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선창가에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시뻘건 노을, 아,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슬픈 황혼이여. [이명윤]
댓글목록
강북수유리님의 댓글
강북수유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 주위에도 이런 분이 계십니다.
소중한 그 무엇이 있기에 그토록 숨기고 싶었을까요...
서피랑님의 댓글의 댓글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일상의 이면에 잠자고 있는 감성을 흔들고,
그리하여 늘 마주하는 풍경을 낯설고 아늑한 색깔로 바꾸어 놓는 것,
그것이 시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