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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를 맞추러 갔다가 / 장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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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7회 작성일 19-01-2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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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를 맞추러 갔다가

장옥관


옛 애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험 하나 들어달라고─. 성대도 늙는가. 굵고 탁한 목소리. 10년 전 이사 올 때 놓았던 고무호스. 벌어진 채 구멍 오므라들지 않던 호스가 떠올랐다.

오후에 돋보기 맞추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 흰 모시 치마저고리만 고집하던 노마님이 사돈집에 갔다가 아래쪽이 조여지지 않아 마루에 선 채로 그만 실례를 하셨다고─.

휴지 가지러 간 사이 식어버린 몸, 애걸복걸 제 몸에 사정하는 딱한 사연도 있다. 조이고 싶어도 조일 수 없는 불수의근(不隨意筋), 늙음이다. 몸 조여지지 않는데도 마음 사그라들지 않는 난감함,

늙음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실은 남남이듯 몸과 마음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깨달음, 찬물에 바닥 적시듯 제 스스로 느끼기 전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실, 그것이 늙음이다.



【감상】

"시 창작의 세 가지 방식─ 느낌, 관찰, 변형─ 중에서 현대에는 마지막의 것이 지배적이며, 그것은 객관 세계에서뿐 아니라 언어와의 연관에서도 그러하다......현대시는 종래의 의미에서의 인간성, '체험', 감상, 그리고 심지어 시인의 개인적 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 시인은 자신의 창작품에 대해 사적인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준엄한 상상력이나 비실재적인 관점에 토대를 둔 변형력을 동원하여 그 자체로는 빈약한 의미밖에 갖지 않는 임의적인 소재를 시험하는 시적인 지성으로서, 언어의 조작자(造作者)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관여한다. 정신의 마력에서 태어난 그러한 시가 시인을 각성시킨다는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는 심정과는 다른 그 무엇이며, 개별적인 감각들로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순수한 주관성이 발하는 여러 겹의 목소리이자 무제약성이다." 『현대시의 구조』(후고 프리드리히)에서.

돋보기는 빛을 모아 종이 따위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 돋보이는 건 감각의 통일; '옛 애인'-'성대'-'고무호스'-'아래쪽'-'실례'-'불수의근' 즉 이미지의 일관성이다. 구멍을 통해서 서술의 진도와 연접관계를 맞춘다.

그렇다면 그 구멍이란 어떤 연계인가. '옛','10년 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시간이 관통한 구멍들이다. 시간이 벌려 놓았으나 마음대로 조여지지 않는 구멍, 시간의 누수이고 시간의 방임이며 시간의 요실금이다.

심장이야 의지와 상관없이 피를 돌리지만,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 그 모호성을 떠도는 게 시일지 모른다. '찬물이 바닥 적시듯' 엎질러져야 비로소 깨닫는 '늙음'은 시간의 몫이지만 어쩌면 시 또한 불수의근처럼 민망한 '실례'처럼 난감하게 아래쪽이 조여지지 않는 현상.

마음은 '흰 모시' 같을 테지만 '제 몸에 사정하는 딱한 사연' 같은 시니피앙, 그리고 그 뜻을 헤아리기 힘든 시니피에.

'몸 조여지지 않는데도 마음 사그라들지 않는 난감함'으로 시를 적고 또 그 시를 읽는다. '옛 애인' 같은 '오므라들지 않던 호스' 같은 '굵고 탁한 목소리'로 '보험 하나 들어달라고─'

모양체근(毛樣體筋)조차 단단히 조여지지 않는 노안으로, 무엇을 도드라지게 보고 돋보이게 할 것인가. 나는 불수의적으로 시가 늙을까 두렵다.


ㅡ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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