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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소 / 박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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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7회 작성일 19-02-0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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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소

박판식


유년시절 자신의 음부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해준 여자의 부음을 듣는다
잘린 잔디밭을 맨발로 걷는다
깨진 거울로 조각난 표정을 맞추는 놀이를 한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모아놓은 유지매미의 숫자를 세거나 커튼을 쳐 놓고 혼자서 논다
물 속에 집을 짓는 잎사귀날도래,
어른이 되지 않으면 물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양친은 내게 친절함과 더불어
견딜 만한 불행을 속주머니처럼 내 몸통에 달아주었다
나는 물 밖으로 나오기 싫은 구름을 끄집어낸 손바닥 위에 올려 놓는다
운명에 재빨리 반응한 것이 가장 먼저 증발한다
손바닥은 뜨거워지고 나는 생기를 얻는다
모두 죽어간다, 하지만 크게 앓고 난 인간은 마치
한번도 손대지 않는 불꽃처럼 다시 살아난다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구름,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감상】

일종의 몽타주 형식의 시이다. 이미지나 사건 등에 대한 편집 형식인 셈이다. 장면이나 서술에서 인과적인 알고리즘을 추구하는 것보다 느슨하거나 색다른 연결고리로 배치하고 조합함으로써 화자의 의도나 심리를 표현하기도 한다.
미장센(총체적인 설계)과는 대비되는, 모자이크하듯이 혹은 퍼즐 조각을 맞추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듯이 전체에만 집중할 뿐 편집적이고 단속적인 구조를 갖는 경우이다.

토르소는 말하자면 몸통이다. 사지와 얼굴이 없는 토막, 가장 불완전한 형태이다. 분해되고 거세된 조각품이다. 사유의 얼굴이나 동적 구조가 없는 자아의 상징물이다.
1행은 사건의 개요이다. 유년시절-음부-부음, 이라는 비약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리은유(음성상징)이며 말놀이다. 유년의 체험이 발화이지만 음절의 재배치로 생성과 사멸이 한 문장에 극단적으로 놓여 있다.
2행 "잘린 잔디밭", "맨발"은 일종의 토르소다. 3형의 "깨진 거울" "조각난 표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2행과 3행 사이의 연계나 연접은 없고 다만 제재에 대한 비유이다. 이 조각으로 전체를 예측하기엔 아직 이르다.
5행의 "유지매미", 땅속에서 오래 살아 있지만 한철 울다 단명하는 존재와 "커튼을 쳐 놓고 혼자"는 상관성이 멀지만 고립되고 유폐된 존재의 표상이다.
6, 7행의 "잎사귀날도래" 또한 유충은 날개 없는 토르소이다.
8, 9행에는 화자가 토르소인 이유를 간략하게 보여준다. 양친-천진-불행-속주머니-몸통 구조에 놓여 있는 유충이었던 셈이다.
10행 "물 밖으로 나오기 싫은 구름"은 화자의 물화된 심리 상태이다. 물 밖을 꺼리는 유폐된 자아이다.
11, 12행은 운명-반응-증발, 그리고 손바닥-생기의 징검다리인데, 유충 혹은 유년이 탈피하는 건 시간적 사건이고 반응이고 또한 증발이다. 물을 나와서 구름으로 상승하는 일이기도 하다.
13, 14행에서 토르소의 순환계를 말한다. "크게 앓고 난 인간"이 "불꽃처럼 다시 살아난다" 동작과 사유를 소거한 몸통만으로도 생성과 소멸이 일어난 것이다.
15행 물 밖을 나온 구름(세대)은 다시 하늘의 구름에 갇힌다. 새로운 세대가 유년을 혹은 유충을 뚫고 증발을 준비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유년과 증발, 토르소는 얼굴과 사지가 애초에 없다. 그것은 생략되거나 소거된 과거이거나 미래다. 성장통은 얼굴(자아의 표상)과 팔다리(동적으로 이행하는 구조)를 잃은 토르소를 닮았다.

이 시는 기승전결의 구조가 없다. 사실 시에서 이런 논리적 구조를 벗어난 지는 오래되었다. 시는 기율의 이중대도 아니지만 논리의 하급부대도 아니다. 다층적이고 개성적인 자아의 몽타주, 'monter'(모으다, 조합하다)에서 생성된 표현적 몽타주인 경우도 있다.
시가 치환 가능한 사건이라면, 누군가는 매미의 유충 같은, 울음을 퇴적하는 긴긴 땅속, 혹은 물속의 세계를 환기할지 모른다.

°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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