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사내 /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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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81회 작성일 19-03-07 01:56본문
고정된 사내 / 여정
벽에 붙박인 그 사내는 사각의 틀 속에 갇혀 정육점의 고기마냥 걸려 있다. 머리
윗부분이 잘린 오른쪽 귀가 잘린 그는 시선을 왼쪽 아래에 두고 눈동자를 움직이
지 않는다. 입술에는 초승달을 베어 물고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링반지를 끼고 턱
을 괴고 있다. 링반지 속에는 그 사내의 영혼 같은 한 여자가 가루가 되어 섞여 있
다. 그 사내는 하반신이 없다.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길은 하반신과 함께 사라졌고
그녀 또한 그 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늘 벽에 붙박여 꿈결 같은 그 길을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마지막 길을 다시 거닐곤 한다. 그 길에는 풀냄새가 초록초록 싱그
럽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 또한 향긋하다. 간혹 그 사내가 뜬눈으로 가위라도 눌리
는 날이면 도로를 이탈한 트럭이 풀들을 짓누르고 그녀의 젖빛 냄새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달려온다. 그럴 때면 풀들조차 비명과 함께 하반신이 잘려나간다. 그런
날이면 벽에 붙박인 그 사내의 고정된 두 눈속에서 피눈물이 마른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를 내며 흘러나오고 그 사내가 붙박인 그 벽조차 붉게 붉게 물들어 노을이 된다
* 여정 : (본명, 최정윤) 1970년 - 2018년 대구 출생,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벌레 11호> 등 다수
< 감 상 >
묘사 보다는 진술 위주로 이루어진 산문시의 묘미를 본다
대개 산문시는 알레고리적 성격을 갖는데 본 시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은 듯,
정육점 벽에 고기덩이 모양 걸려있는 낡은 사진을 보고서 화자는
자신의 초라한 옛 모습을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빠져드는데,
머리 윗 부분과 오른쪽 귀가 잘리고, 시선은 왼쪽 아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초승달 같은 입술과 턱을 괴고 있는 모습, 비명과 함께 잘려나간 하반신 그리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 향긋하고 영혼과도 같은 링반지와
이제는 떠나고 없는 그 녀와 함께 걸었던 초록초록 풀냄새 싱스러운 그 마지막 길등
화자는 파란만장 했던 지난 날들을 한 편의 영화 장면처럼 추억하고 있다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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