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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시, 읽을 것인가? 쓸 것인가 [멸치를 우리다/박동철 외 2]-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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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176회 작성일 19-03-26 11:56

본문

 * 시, 읽을 것인가? 쓸 것인가

 

멸치를 우리다/ 박동철

의자를 지키다/ 박선희

돌의 비밀/ 이필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문학 장르 중에서 가장 독자와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 무엇일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시’라는 결론이 나오는 요즘이다. 그나마 소설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좋은 작품 덕인지 서점의 가판대에 베스트셀러라는 표지를 달고 꾸준하게 팔리고 있는 듯하다. 소설 이외에 각종 교양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제, **문화에 대한 이해,**다이어트 비결, 등등의 책 역시 독자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시집이 자신이 비용을 내고 출판하고 서점에 진열은 보통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다. 심한 경우엔 지인에게 선물하기 위한 그저 그런 증정용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시의 내용이나 글의 수준 여부를 떠나 ‘시’라는 글자만 봐도 머리 아프거나, 감정이 메마른 현대사회라고 핑계를 붙이기에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자와의 거리가 멀어진 이유를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이유가 많아도 너무 많다. 현대시는 오래 전의 시보다 수준이 낮을까? 아닐 것이다. 최근에 발표되는 시들은 오히려 글의 내밀함이나 진중함, 다양함에 있어 매우 좋은 시들이 대다수라고 볼 수 있다. 시의 본질적 구분으로 볼 때, 기술적인 측면에서 요즘 시들은 소위 말하는 읽을 맛이 충분한 작품들의 홍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의 발달로 인하여 긴 글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요즘 세태라고 치부하기에는 오히려 당혹스럽다. 시만큼 짧은 글이 어디 있을까? 길어야 30행 내외에서 결론이 나는 작품인데, 문자로 치면 멀티미디어 메시지로 충분히 전송되고 읽을 수 있는 것인데 시는 점점 독자와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한 시집이나 개인이 출판한 시집이나 발행부수가 천부를 넘어가기 힘들고, 1쇄, 2쇄, 이상 출간하기도 힘들다. 그나마 지인이 사주지 않으면 어떤 경우 열 권도 팔리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머지 시집은 시집을 출간한 시인의 서재에서 뒹굴다 시쳇말로 ‘라면 받침’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들고(실례로 어느 지역 동인에서 최근에 출간한 동인 시집의 이름이 ‘라면 받침’이다. 꽤 서글프고 자조스러운 이름이다.), 어느 시인의 말에 의하면 새로 출간한 시집을 책자 앞면에 정성스럽게 서명을 해서 동창회에 가서 나누어 주었는데 동창회가 끝나고 나가는데 음식점 밥상 밑에 자기 시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면전에서는 마치 계수기 넘기듯 드르륵 넘겨보는 척하다, 손에 쥐고 가는 사람 하나 없는 시인의 하루, 그가 주섬주섬 자신의 책을 하나둘 다시 챙겨 들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쩌면 그것이 내 자화상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4월 달 글제를 생각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를 쓰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우스갯소리로 시를 가장 안 읽는 직업군이 ‘시인’이라는 말이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하나의 문화이며 예술 활동이다. 문화의 융성은 모방에 있다고 해도 큰 실언은 아닐 것이다. 모방이라는 것은 표절이나 베껴 쓴다는 말과는 다르다. 모방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것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거나 옮겨놓음 혹은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 나타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반복행위다.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반복되는 행위를 말하고 싶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글의 본질에 담겨있는 문화를 배우는 것이고 글의 내면에 담긴 정신을 배우는 것이며 나와 다른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평론을 쓰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한 달에 약 400여 편의 시를 읽게 된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한 달에 몇 편이나 타인의 시 혹은 시집을 읽고 있는지? 서점까지는 안 가더라도 인터넷을 통해 신간 시집을 구매해 본 적은 있는지? 아마, 답은 모두 다르겠지만, 또한 이유와 변명도 다르겠지만 (읽을 시집이 없어서, 시집 살 돈이 없어서, 그냥 아무나 주니까...)등등의 의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그렇게 많이 타인의 시를 읽거나 시집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타인의 글에 우리가 인색한 것인지?

 

어느 시인과 담화를 나누다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시를 쓰는 이유가 아마도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닐까? ‘보여주기’라는 말에 잠시 호흡이 멎는다. 필자 역시 시를 쓰면서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쓴 것만 같다. 누가 어떤 시를 쓰든 그것은 본질 이외의 문제이며 남의 일인 것이다. 가장 시를 잘 쓰는 시인은 아마도 가장 많이 타인의 시를 읽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초, 중, 고등학교 시절 우리 모두 김소월의 시를 읽고 시가 이런 것이구나 혹은 조지훈이나 정지용의 시를 읽으면서 시가 이런 것이다 하는 생각이 인식되고 나도 시를 써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다. 타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 시에 무량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고 씨앗이 되는 것이다. 시인조차 시를 읽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독자라는 이름을 들고 시집을 구매할 것인가?

 

시를 쓴다면, 아니 최소한 시를 쓰려고 한다면 먼저 시를 읽기를 권장하고 싶다. 그것도 눈으로 대충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 빨간 펜이나 형광펜을 들고 밑줄 쫙 그으면서 시의 맛을 음미하기를 권면하고 싶다. 시가 짧은 글이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시 속의 생각이나 성찰, 사상, 눅진한 삶의 시간들, 시인이 하필 그 자리에 그 단어를 채집하여 사용하게 된 그 깊은 밤의 고뇌에 대하여 한 번 두 번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시인과 독자의 동질성이며 시인과 독자의 몰입이며, 시인이며 독자인 사람의 몫인 것이다. 짧다는 것은 길다는 말과 동의어다. 많은 말을 줄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인지는 시를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창작의 고통이다. 무조건 시를 쓴다고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조건 많은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비록 그가 시 한 편 버무리지 못했다 해도 이미 그는 시인 자격증을 획득한 것이다. 흔한 말로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주고받는 것이라고 한다. 같은 말이다. 시는 쓰고 읽는 것이다. 어느 일방의 쓰기만, 읽기만이 아니라 읽고 또 써야 시가 발전하고 시를 사랑하는 시인이 될 것이다.

 

많은 문학 강좌를 듣거나 서적을 통해 읽어도 시를 잘 쓰는 비법 혹은 잘 쓰는 방법에 대한 것들만 나열되어 있다. 시는 연민을 통해 연민을 담는 방법이다. 시는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시 창작이란 무엇인가, 쉬운 시의 어려움, 중심 소재의 제목 화, 현대시의 문제점, 왜 문학 판이 이렇게 싸늘한가? 이미지 선택 방식을 통한 시 창작이론, 등등의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론이 무수하게 많고 넘친다. 이른바 쓰는 것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주목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쓰기 전에 읽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읽는 방법을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혼으로, 정신으로, 꿈으로, 상상으로, 드라마 보듯 몰입해서 읽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시 공부다. 문법이나 기술적 구성,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법, 관념과 존재, 수미상관의 법칙 등등의 딱딱한 이론에 앞서 시가 갖고 있는 본질, 그것은 시인이 시를 쓰게 된 동기와 풍경과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평론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좋다 나쁘다, 어떻다, 아니다, 주어가 선명하지 못하다, 서술 방법이 관념적이다.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기술이 탁월하다. 등등의 분석적 방법에 의한 (어쩌면 이런 분석이 말 그대로 분석이 될 뿐이다.)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읽어 주고 감동하고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시 읽기라는 생각이 든다. 시 한 편에 모든 철학과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어렵다. 다만, 시인은 그 어떤 찰나의 순간을 삶에 대입해 자신만의 시선에 대한 공식을 만든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을 보는 눈, 시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합집합이 될 때 제대로 된 시 한 편 맛있게 읽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좋은 시를 짓기 위한 가장 올바른 해답을 찾는 첩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달의 글제는 시, 읽을 것인가? 쓸 것인가? 다. 필자는 쓰기 전에 반드시 읽는 것은 습관화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매일 열 편의 시를 읽으면 한 편의 시를 쓴 것보다 더 많은 효과를 보게 된다. 부지런히 읽고 부지런히 기록하고 부지런히 필사하고 부지런히 생각하고 부지런히 생각을 키우면 그것이 바로 ‘공부’다. 시론이나 시학이나 평론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과 타인의 눈을 맞추는 것, 그것이 진짜 시인이며 제대로 된 시인일 것이다. 쓰는 것부터 시작하지 말고, 읽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야 말로 시를 사랑하는 일이다. 시를 사랑하지 않고 시를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가짜 시인이다. 단순히 보여주기에만 급급한, 자신의 프로필에만 급급한, 인정받는 것에만 급급한, 우리 시대 시인의 자화상은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바로 자신, 자신이 읽어 줄 수 있는 시, 자신에게 당당한 시, 자신과 한 몸으로 살아가는 시, 그 속에서 시와 더불어 나머지 삶을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 당장, 시 한 편 읽자. 누구의 시라도, 수준이 낮던, 높던, 길거리에 홍보물 뿌리듯 손쉽게 얻어온 시집 한 권이라도, 책장 속에서 낮게 신음하는 그들을 꺼내 내 것으로 만들자. 필자는 시인의 개념을 이렇게 구분하고 싶다. 시인은 시를 읽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쓰는 사람이기도 한.

 

모던포엠 4월호에서는 글제에 맞춰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시 세 편을 선정해서 소개한다. 물론 부담스럽지 않다는 말은 시의 수준이 어떻다는 말이 아니다. 수준이 높으면서도 마음에 쉽게 와 닿는 시가 가장 좋은 시라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어려운 것을 어렵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며, 그러면서도 시적 장치와 시의 라임을 잃지 않는다는 것, 독자로 하여금 아릿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시 세편을 소개한다.

 

첫 번째 작품은 박동철 시인의 [멸치를 우리다]라는 작품이다. 국수를 먹기 위해 멸치 국물을 우려내다 어머니를 떠올리고, 떠올린 어머니에 대한 기억 속에서 시인 자신을 반성하거나 혹은 성찰하는 모습을 담담한 필체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우려낸 작품이다.

 

멸치를 우리다

 

박동철

 

국수를 삶아 먹으려고 멸치를 우린다

끓는 물속을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멸치

그렇게 육수를 우려내는 냄비 속에서

시장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내게 쏟아내던 어머니의 땀이 보인다

배고픔을 견디던 푸른 힘줄이 보인다

내 젊은 허영들과 맞바꾼

아직도 그 허기의 안쪽을 보는

집요한 눈빛이 보인다

집과 시장을 오가며 늘 풀어놓던

상처가 된 온기는 사라진 지 오래

평생을 우려낸 몸 요양 병원 한켠에 누이고

더는 우릴 것도 없는 마른 몰골의

둥글게 말린 굽은 등

꼬부라져서 펴지지 않는 무릎

긴 시간 뒤엉킨 삶을 젓가락으로 집어삼킨다

오랜 시간 흘러온 생의 얼룩들, 담담히

목구멍을 타고 넘는데

내가 펄펄 끓는 냄비 속을 유영하는

멸치가 된 듯

갑자기 몸이 뜨거워진다

 

마치 소설의 한 부분을 읽듯 시인이 그려낸 심상을 쫒아 가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내 어머니의 얼굴이 뒤따라오게 된다. 시인이 쓴 것은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인데, 독자인 나는 내 어머니를 쓴 것이라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 점은 시에서 매우 중요하다. 시인의 일방적 감상의 단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이 풀어놓은 이야기 속에는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일상과 비슷한 삶의 시간들이 공유되고 전개되어 있다는 말이며 기술적으로 환원하여 말하면 자연스러움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는 말이다. (유도라는 말은 부정의 의미가 아님을 밝힌다.) 유행가 제목처럼 ‘나와 같다면’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상옥 시인이 강의한 현대시의 문제점이라는 글을 일부분 인용해 본다.

 

1. 현대시에 대한 불만 사례

 

이 지역의 모 방송국 심야프로 '시가 있는 한밤'이라는 코너에서 지난 4월부터

매주(월-금) 5편씩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 코너에서 가능하면 어제의 시보다는 오늘의 시를 청취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갓 나온 월간지나 계간지를 자세하게 읽는 편이다.

의외로 소개할 만한 시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예전에 나온 문예지나 시집 등에서 시를 고를 때가 많다.

 

오늘의 시가 너무 지나치게 난삽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강희근도 <<시 읽기의 행복>>(을유문화사, 2000)에서 애초에는 시집을 들고 앉으면

고향 가는 열차를 탄 마음이 되거나 어머니 손을 붙잡고 가는 길에 나서는 마음이 되는

그런 것이 시였기에 시는 설레고 들뜨고 그립고 간절한 그런 것이었으며 부담도 체면도

준비도 치장도 염려할 필요 없이 그냥 맨 얼굴로 함께 숨 쉬며 있는 것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낯선 손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면서,

독자와 시를 시나브로 떼어 놓는 시의 오적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

 

그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시인들의 엄숙주의'이다.

엄숙주의는 "시인들의 말이 필요 이상으로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편하게 풀어도 될 자리에 힘을 많이 주거나 현학으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 시는

쓸데없는 난해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시의 문제점-이상옥」부분 인용

 

요즘 시는 왜 두 번 이상 읽어야 되나?

요즘 시는 왜 세 번 읽고도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나?

 

국어 공부 다시 하자

중학 나온 놈이

제 나라 말로 쓴 시를

한번 읽고 못 알아먹고

두 번 읽고도 못 알아먹고

세 번 읽고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겠으니

국어 공부 다시 하자

시인들을 위하여!

 

아, 님아, 김소월님아

다시 한 번 이 땅에 살아 돌아와

한번만 읽어도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수 있는

시 좀 써 달라

중학생이 읽고서도

단번에 사랑 병이

듬뿍 듬뿍 들 수 있는

보통 시 좀 써 달라

 

「이관희, <시론 3. 난해 시에 대한 신경질」부분 인용

 

위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듯 강의의 요점을 생각해 보면 가능한 ‘쉽게’라는 것이다. 엄숙주의 혹은 난해 등등의 말을 차용하지 않아도 요점은 매우 간단하다. 독자로 하여금 ‘나와 같다면’을 인식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몰론 좀 더 고급이라고 흔히 말하는 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고급은 좀 더 고급의 독자, 이른바 ‘팬덤(fandom)’을 갖고 있고, 그 역시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보통의 독자, 보통의 시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선호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몸에 밴 ;멸치를 우리다'와 같은 시 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부정하지 못한다.

 

박동철 시인은 시를 우려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는 것을 우리는 우려낸다고 하지 않는다. 은근한 불에 오랜 시간 약초 물을 우려내는 전통의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인스턴트가 아닌 전통의 제조법은 그 맛의 깊이가 다르다. 간장이 그렇고 된장이 그렇다. 끈질기고 집요한 관찰과 관찰을 통해 얻은 성찰이 은근하게 녹아 있다.

 

끓는 물속을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멸치

그렇게 육수를 우려내는 냄비 속에서/

 

시장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내게 쏟아내던 어머니의 땀이 보인다

배고픔을 견디던 푸른 힘줄이 보인다

내 젊은 허영들과 맞바꾼

아직도 그 허기의 안쪽을 보는

집요한 눈빛이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를 우직하게 강조하고 있다.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머니의 삶이다. 그렇게 육수를 우려내듯 살아온 어머니의 땀과 힘줄과 그것들과 맞바꾼 내 삶의 허영. 허영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영은 자기의 지식이나 경제적 능력, 분수 등에 어울리지 않게 겉만 화려한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로 시인은 ‘허영’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사용하게 되었을까? 성찰이다. 보인 것에서 나를 보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다만, 보인 것이 아니라, 나를 보게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의 덕목이다.

 

허영/ 집요/ 눈빛/ 허기의 안쪽/

 

시인이 선택한 단어만 채집해도 시인과 나의 동질감을 수월하게 잉태된다.

 

더는 우릴 것도 없는 마른 몰골의

둥글게 말린 굽은 등

꼬부라져서 펴지지 않는 무릎/

 

내가 펄펄 끓는 냄비 속을 유영하는

멸치가 된 듯

갑자기 몸이 뜨거워진다

 

시인의 성찰의 끝은 반성이다. 허영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굽은 등과 냄비 속을 유영하는 멸치.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방식이다. 그리고 한 편의 좋은 시다.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박선희 시인의 [의자를 지키다]라는 작품이다. 주지하다시피 의자를 소재로 한 작품은 매우 많은 편이다. 의자를 보는 타자他者적 관점, 의자의 입장에서 본 자의적 관점, 모든 관점에서 기 발표한 작품이 많다. 하지만 박선희의 작품은 소재의 일반적인 것을 뛰어넘는 기묘한 장점이 있다. 의자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시선’이 아닌 삐거덕, 이라는 소릴 주제어로 놓고 그걸 풀어가는 기술적인 특징이 탁월하게 보였다.

 

의자를 지키다

 

박선희

 

의자에 앉아있다

오랫동안 눌러놓은 돌멩이처럼

자리를 지키며

입구 쪽을 힐금거린다

 

악어이빨 자크를 물고

시선의 먹잇감이 되지 않겠다는 듯

목줄이 당겨진다

팽팽하다

 

지하철을 오르내리며

지친 어깨에 매달려 뒤뚱거리던 걸음

수시로 쑤셔 놓은 불만으로

퉁퉁 부어있던 그는,

 

가방이라 불리기 전

한 번도 담아본 적 없는 나를 찾은 걸까

앉아있는 일이 전부라는 듯

바깥으로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

 

오래도록 열리지 않는 출입문을

각진 얼굴로 바라본다

삐거덕,

자세를 고쳐 앉는지

의자가 소리를 낸다

소리가 주인인가

 

시를 읽으며 묘하게도 프랑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프랑스 영화가 어떻지? 하고 물으면 필자는 대답할 말이 하나도 없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프랑스 대사관에서 상영하는 공짜 영화를 몇십 편, 시간 때우느라 알아듣지도 못할 영화 화면을 아무 생각 없이 본 것이 전부다. 누와르 영화도 아닌, 서정성 강한 영화를 보면서 필자의 무의식의 한 부분에 프랑스 영화는 이런 것이다 하는 의식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왜 프랑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에 대한 대답 치고는 참 멋쩍다. 하지만 박선희 시인의 시는 베일을 한 겹 두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오전 10시쯤과 같은, 그 베일을 걷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세계는 실루엣처럼 몽롱한 환각을 준다. 의자에 앉아 의자를 지켰을 뿐인데, 의자에 가방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데 그 가방이 누굴 보는지, 기다리는지, 악어이빨을 앙 다물고 있는지 아무 궁금증도 없는데, ~데, ~데, ~데를 유발하다 결구를 툭 하나 던진다.

 

악어이빨 자크를 물고

시선의 먹잇감이 되지 않겠다는 듯/

 

수시로 쑤셔 놓은 불만으로

퉁퉁 부어있던 그는,/

앉아있는 일이 전부라는 듯/

오래도록 열리지 않는 출입문을/

 

시인이 의도했던 안 했던 독자의 입장인 필자는 `~~데를 연발하다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삐거덕,

자세를 고쳐 앉는지

의자가 소리를 낸다

소리가 주인인가/

 

소리가 주인인가를 결론으로 던진다. 아! 그래서 프랑스 영화를 본 듯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는 문외한이지만 필자의 단순한 기억에 일반적으로 예전 프랑스 영화는 나른했다. 색조와 화면과 특유의 발음으로 인해 더욱 몽환적이었다. 요즘 말로 뭐지? 뭐지? 하면서도 결론을 꿋꿋하게 기다리게 되는. 의자와 가방의 잠시 동거, 의자가 가방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방이 의자를 지키고 있는 것과 동일시하게 느껴지는 ‘나’이면서 동시에 ‘너’ 관점이면서 동시에 시점이기도 한 표현이 독특하고 기발하다. 말미에서도 이런 효과를 내고 있다. 소리를 낸 것은 ‘의자’ 하지만 동시에 ‘소리’라는 것에도 개아적인 숨을 넣었다. 문득, ‘본래무일물’이라는 불가의 말씀의 머릴 스친다. 박선희 시인의 시 속엔 불투명한 영상과 영상이 데칼코마니처럼 서로의 반대편에 선명하게 부조되어 있는 듯하다.

 

마지막 작품은 이필 시인의 [돌의 비밀]이라는 작품이다. 이필 시인의 작품 역시 박선희 시인의 작품과 비슷한 '모호‘를 기반에 두었다. 물론 그 ’모호‘라는 것이 모호하지 않은 모호를 기반에 두고 있기에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돌에게 무슨 비밀이 있을 것인가? 돌은 돌인데, 돌과 나와 혹은 삶과, 타인과 어떤 상관계수나 공식을 갖고 유기적인 효과를 낼 것인가를 생각하며 시를 읽게 된다.

 

 

돌의 비밀

 

이필

 

꿈속에서 돌을 세워 놓았다. 혼자 돌을 다 돌볼 수가 없다. 웅성거리는 돌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돌을 한 줄로 늘어놓는 게 좋겠다.

 

돌이 몸속으로 밀려들어갔다. 들어가서 저도 모르는 얼굴에서 휘어졌다. 대부분의

돌은 휘어지기 전에 제 뒤통수를 내리친다. 만인에게 공평하다.

 

돌은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잊어버린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저보다 작은 돌을

가져다 놓는다. 돌이 돌을 떨구는 소리가 한데 섞인다.

 

당분간 돌을 떠나서 지낼 것이다. 돌아보는 순간 다른 돌로 변할 것이다. 돌은 그저

돌에 지나지 않아서 땅 속에 묻혔다. 눈을 뜨는 순간 아무도 돌을 깨울 수가 없다.

 

바닥에서부터 부서지려고 돌이 서 있었다.

 

이필 시인의 작품은 기본이 탄탄하게 구성되어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 반. 합이라는 논리적인 부분도 가미되어 있고, 시인의 머릿속에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고 돌이라는 소재에 은유와 비유, 진술을 적당히 섞어 끝까지 시를 끌고 가는 점이 시의 교본적 측면에서 솔직하고 진중하게 버무린 작품이다. 돌은 사람이며 돌은 의견이며 돌은 사회이며 돌은 문화이며 돌은 인민이며 돌은 나이면서 동시에 너, 그리고 우리가 된다. 돌의 비밀에는 비밀이 없다. 그것이 시인이 의도한 비밀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배경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문이 아닌 문장을 비문처럼 사용한 것도, ‘돌’이라는 이미지 혹은 영상, 환상, 목적 등, 어떤 이유와 변명을 붙여도 해석이 되게 만드는 것도 시적 내공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꿈속/ 돌을 세우다/ 돌을 한 줄로 늘어놓다/ 대부분의 돌은 휘어지기 전에 제 뒤통수를 내리친다/ 돌이 돌을 떨구다/ 돌아보는 순간 다른 돌로 변할 것이다/

이 모든 단어의 선택에 성경의 몇 구절을 대입해 보았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1~11)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9)

 

돌과 관련된 또 다른 것은 이탈리아 폼페이에 닥친 화산 폭발, 하룻밤 사이에 돌로 변한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시인은 성경 혹은 폼페이를 연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비밀에 속하기에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의 상상과 공상에 오지랖을 섞은 해설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구에 있다.

 

바닥에서부터 부서지려고 돌이 서 있었다.

 

첫 행에서 꿈속에 돌을 세웠다고 시인은 말한다. 살면서 그 세워놓은 돌을 이리저리 궁리하며 살았다. 휘어지기도 하고, 뒤통수를 내리치기도 하고, 돌이 돌을 떨구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돌이 세워진 연원은 바닥에서부터 부서지려고 다. 세워지기 이전의 상태, 바닥, 부서지려고 에 방점을 두고 시인의 시는 ‘꿈속’을 첫 행에 세워놓았다는 심증이 든다. 좋은 작품에는 배경이 선명하다. 한 번 읽고 선명한 것도 있고 여러 번 읽어 선명한 것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선명이다. 시인이 독자에게 부여한 메시지의 농도가 선홍빛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바닥에서부터 부서지려고 지금까지 직립으로 걷고 뛰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봄이 성큼 왔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며칠도 지나가고 대체적으로 맑은 공기가 봄을 만끽하게 한다. 곧 목련이 가장 먼저 개화할 것이고, 개나리 진달래가 지천으로 유채화를 그려낼 것이다. 이 봄에, 찬란한 봄에 호주머니 털어 시집 한 권 주문해 보자. 누구의 작품이든 모든 작품은 신성하고 아름답다. 글의 수준, 이런 것을 논하지 말자. 다만, 시를 쓴 시인의 가슴을 생각하며 한 단어, 한 줄 문장에도 귀 기울여 보자. 그것이 가장 최고의 시 공부라는 것을 강조하며 맺는다.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추천1

댓글목록

詩農님의 댓글

profile_image 詩農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완전 동감입니다 저는 올해도 인터넷으로 시집을 여러권 샀습니다만 늘 실망을 합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되는 시로 가득차있기 때문이죠 그런 저를 보고 아내는 딱하다는듯 혀를 찹니다 저는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불어까지도 사전을 찾으면 더듬거리긴 하지만 읽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는 사전을 찾아도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지쳐갑니다 자꾸 불에 덴 아이처럼 불곁에 가기 싫어집니다 김부회시이님 말씀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시를 읽을  것을 강조하는 대목에는 좀 망설여집니다

金富會님의 댓글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농님...말씀 감사합니다.
제 의견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시인이라면
시를 읽는 것이 먼저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언어 습득은
주변의 말을 듣고부터 시작했듯이...
환 한 봄 지으시기 바랍니다.

붉은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붉은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를 쓰려고만 했지 진심 마음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어느 언저리 쯤에라도 제가 있는지 ~~~~

차곡차곡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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