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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태워 시가 빛날 때 /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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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47회 작성일 19-05-0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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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태워 시가 빛날 때

  이원규




젖은 장작은 말수가 적어
이 세상의 신문은 불쏘시개로 태어났다
외설적인 정치면과 다이어트 중인 문화면
노안의 글씨는 작아도 거짓말처럼 화력이 좋지만
엄동설한에 솔가리며 신문지마저 떨어지니
소지를 올리듯 문예지를 태운다

표지는 뻣뻣하고 목차는 미끄러워
문화예술의 연기인지 그을음인지
과묵한 장작은 쉬쉬 거품을 내뿜지 않는다
재생 속지의 보드라운 수필을 훑어보다
엄살 심한 문장을 찢어 아궁이에 넣으니
글자들끼리 서로 간질이며 타오르고
때로 쉬운 것이 더 어려운 비평의 요지는
같은 대학 다녔어요 술친구예요
후배인지 제자인지 나랑 사귈까요
활발한 문맥의 얼굴을 비비며 불타오른다
숲만 무성한 소설은 울울 오래 타고
불통의 시를 한글로 번역하며
궁시렁 궁시렁 아궁이에 집어넣으니
숨 가쁜 산문시는 더 빠르게
여백이 있는 시는 그래도 좀 천천히
촌철의 시는 문득 푸른 불꽃을 일으키는데
어쩐지 낯익은 나의 시 세 편은
혈흔 지문 발자국도 없는 완전범죄

미적 거리가 가깝거나 너무 멀거나
영하 십도의 겨울밤 계간 문예지의 다비식은
자꾸 눈이 맵고 얼얼해지는 것이어서
시를 태워 시가 빛날 때
구들방 아랫목이 먼저 후끈 달아올랐다
안방 솜이불을 걷어젖히자
나이테 무늬 장판 위에 상형문자 같은
검붉은 불도장이 찍혀 있고
연기를 빼려고 유리창을 열다 보니
안과 밖의 경계 그 차고 맑은 얼굴에
원고지 천삼백 장 분량의 성에꽃이 피었다



이원규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1984년 《월간문학》과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빨치산 편지』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돌아보면 그가 있다』 『옛 애인의 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산문집 『지리산 편지』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등.



【감상】

  어린 랭보는 당대의 시 면상에 오줌을 갈겼다. 그때 미소년의 자지는 빳빳했을 것이다. 음풍농월한다면 바람과 달은 죄가 없다. 그러나 음과 농은 유죄다.
  책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없다.
  시 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없다.
  유무의 문제라면, 척후(斥候)들만 바쁘다. 전망은 난간에서 살필 수 있지만, 그 낭떠러지는 곧, 멸망의 발끝이기도 하다.
  시는 지극히 개인적이나 사회적이다. 사회적이나 다들 고사하고 몇몇이 역사적이다. 그 역사는 오염된 얼룩일 때가 많다. 그러나 시는 퇴비의 빅뱅으로 태어난다.
  고만고만한 것을 끄적거리는 데 일생을 소비했다면, 우주를 날아가는 돌처럼 똥끝 짧은 멸망이다. 누구나의 내지엔 그러나가 살지만,
  '촌철의 시'는 양철 조각 끝으로 심장을 찌를 때일 것이나, 그 또한 조루일 수 있다.
  시는 방목되나, 저물녘 집으로 돌아오는 양은 단 한 마리다, 그 놈의 내장을 꺼내 말리고 비비고 꼬면 리르(lyre)가 된다. 그 현(絃)이 소리를 낸다면 서정시다.
  시를 비꼬는 시 중에서 좋은 시 보지 못했지만,
  시에게 생계를 맡기고 먼먼 우주를 개척하는 시인치고 재벌이 된 놈 보지 못했지만, 시는 종래로 '불쏘시개'의 운명이다.
  우리는 오줌이 마렵지만, 그 곁불을 쬐며, 생의 지루를 지체할 뿐이다.
  랭보의 오줌발은 상징적으로 뻗었으나, 자세히 내막을 알 수 없고,
  구들방 아랫목이 후끈 달아오르는 일은 시, 아니어도 된다.
  '혈흔 지문 발자국도 없는 완전범죄'
  그 허구의 면상에 오줌을 누고 싶다.
  화상은 눈으로 온다. 꽃불이 번질 때가 더 뜨겁다. 제각각 불을 구워, 차가운 꽃을 피워려 애쓸 뿐이다. 원고지 찾아, 삼만리 그것 참 예삿일이다. ㅡ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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