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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허용오차 범위 / 외줄(구수영)외 2 - 글/ 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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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4회 작성일 20-01-08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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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詩, 허용오차 범위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외줄/ 구수영

시대착오적인 의자/ 김민율

알 수도 있는 사람/ 정우림

 

  어떤 것의 값을 측정하거나 조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차의 범위를 보통 허용오차라고 말한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여론조사 같은 경우, 여론조사의 대상이나 범위 답의 범주를 이야기할 때 허용오차가 어떤 범위 내에서 측정값을 얻었는지에 대한 공표를 하게 되어있어 일반화된 단어라고 해도 무리 없을 것이다. 허용오차는 기계, 건축물, 등에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기는 하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규정된 기준값과 규정된 한계값의 차이 혹은 설계와 실물과의 치수 차, 규정량과 실제량의 차이 등을 전문적인 허용오차라고 인식하고 있다.

 

  허용오차를 글, 혹은 시에서 규정한다면 무슨 말? 하는 질문이 가장 먼저 대두될 것이다. 시에서 표현하는 내용?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의 범위?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금기시하는 단어의 조합?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시의 본문에서 표현할 수 있는 철학, 사유의 깊이에 대한 허용오차를 말하기보다는 시의 외연에 대한 허용오차의 범위를 말하고 싶다. 외연에 대한 것이라면 수사修辭를 말한다. 시는 깊은 사유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며 동시에 화자 스스로 얻은 성찰의 단서를 은유, 비유, 이미지 들을 통하여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문제는 사유의 깊이와 성찰의 두께가 글자화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비만이 문제일 것이다. 많은 것은 담거나 애초부터 적은 것을 많이 담은 것처럼 포장하거나 할 때,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수사의 비만 혹은 수사의 왜소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표준체형이 옷을 걸친 것과 비만한 사람, 혹은 왜소한 사람이 걸친 옷의 맵시는 분명히 다를 것이며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필자가 이전에 시의 화장법이라는 기고를 통해 시는 민낯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수사, 가장 좋은 수사의 범위는 허용오차의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허용오차의 범위는 측정 대상에 따라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보편타당한 오차의 범위는 -5~+5 정도로 다소 관용한 범위를 허용하는 듯하다. 이러한 허용오차를 비슷하게 지킨 작품은 서늘하거나 무겁거나 어색하거나 어눌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시의 맵시가 아주 좋다는 말이다.

 

  시를 한 벌의 옷으로 생각해보자. 내 몸에 걸친 한 벌의 옷이 상의는 양복이고 하의는 한복이라는 가정을 해 본다. 물론, 현대사회는 다양성이 필요하고 각자의 개성과 감각이 어우러져 이전보다는 관용의 범위가 넓지만, 그러한 언발란스가 반드시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언발란스 역시 기본이라는 개념을 충족한 이후에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개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복 상의에 한복 하의는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양장에 고무신 역시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한 여름에 털 옷 역시 아무리 패션이라는 이벤트를 붙여도 안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맞는 옷이라는 것이다. 시에서 단어, 문장, 구성, 행과 연, 주제, 소재, 비유, 은유, 환유 이 모든 것들은 한 벌의 옷을 구성하는 단위가 된다. 이 모든 구성요소가 정확하게 일치할 때 우리는 좋은 작품이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정확하게 구성요소가 일치하는 것도 어느 경우에 있어 식상과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빈틈은 있어야 접근하거나 대화할 용기가 생긴다고 한다. 조각가가 깎아 놓은 듯한 조각 미남의 경우도 같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정배열된다는 것은 안정성 측면에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신선함이나 독특함과는 다소 거리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한 것과 같은 말이다.

 

  시는 정배열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다. 묵시적인 관습 혹은 암묵적인 정형성에 의지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생각의 정형화를 초래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생각의 정형화는 사고체계의 일관성 측면에서는 좋은 현상일 수 있으나. 사유의 경직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필자가 늘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는 좀 더 남과 다른 이라는 말이다. 다르다는 것에서 허용오차의 범위를 적용하면 될 듯하다. 다른 것의 범주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것을 말하고 싶다. 완전히 다른 개념의 작품은 실험정신이나 사유의 획기적인 참신함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 그 생명력은 기존의 것에 비해 상당히 짧을 것으로 판단된다. 마치 유행이 짧은 것처럼. 기존 혹은 기성의 작품에서 보이는 좋은 점들을 내게 수렴하여 또 다른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을 필자는 창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창작創作은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적어도 문학의 범주안에 있는 모든 것은 전에 없던 것이라는 것에서 다소 양보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 우리의 말과 글은 전혀 없던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대화와 느낌, 삶이라는 대 명제는 늘 우리의 일상과 같이 공존하고 있던 것들이다. 다만,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 장르의 특징에 맞춰 시, 소설, 수필, 희극, 등등의 구분을 짓는 것이며 그 구분 지어진 속에서 A= a 가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을 창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문자가 소문자로 변화하는 것을 복사 혹은 패러디라고 할 수 없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창작은 기존의 무엇에서 무엇으로 변화하는 과정, 진화라고 해야 정답이 될 것이다. 진화는 염색체의 개수가 하나만 달라도 전혀 다른 개체가 된다. 시 역시 같은 방법의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엄격한 의미의 창작은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한 것 외엔 모두 창작의 허용오차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진화라고 하면 맞다. 간혹, 글을 쓰다 보면 기시감이 충만하다는 지적을 하거나 받거나 한다. 기시감, 어디선가 읽은 듯, 본 듯, 느낀 듯 그 모든 공유의 대상을 기시감이라고 하면 맞다. 하지만 다소 억울할 경우도 많다. 나는 본 적도, 읽은 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데 하는 생각은 누구나 했을 것이다. 그런 경우가 허용오차의 범위 내라고 하면 맞을 듯하다. 일반적인 허용오차의 범위를 넘거나 부족하거나 할 때, 기시감이라는 오해를 수 없이 받게 되는 것 같다.

 

  퇴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 가며 다듬어 고치는 일을 퇴고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읽어가며’와 ‘ 다듬어 고치는’에 있다.. 무엇을 다듬어 고칠 것인가? 필자는 퇴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을 빼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힘을 뺀다는 것은 허용오차의 범위를 줄이는 일이다. 너무 과도한 수사 혹은 너무 왜소한 수사는 시를 시에서 먼 곳으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라는 생각이다. 과도한 수사는 사유의 방만을 일으키기 쉬우며 또한 부족한 사유를 ‘포장’이라는 미명 하에 단순히 꾸며주는 부사적, 형용사적 용법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작품이 교언영색에 빠져 진정성이라는 시의 본질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시를 쓰면서 경계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도 너무나 많은 것도 사실이다. 과연 누가 시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피해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영어 표현은 절대 안 된다는 식의 경계선을 그어 말할 것인가? 그 모든 잣대는 결국 시의 본원 가치를 훼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의 본원 가치는 서정을 바탕에 둔 현실인식과 미래 지향적이 되어야 한다. 무기력하고 단조로운 넋두리에서 벗어나 좀 더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공감하고 소통하며 미래를 향유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물론 필자가 정답은 아니다. 동시에 오답도 아니다. 허용오차는 절충이라는 말이다. 단점과 장점을 극복하거나 보듬어 안고, 또 다른 개념의 삶을 투영하는 것이 올바른 시 짓기의 한 형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배설이 아니다. 시는 복사가 아니다. 시는 혼자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될 때 그 생명력이 무한히 진화하는 것이다.

 

  시에서 허용오차의 범위라는 것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좀 더 좁혀 말하면 기시감의 허용오차는 충분히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기시감을 충분히 절충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더 많은 작품을 읽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것들을 관찰하고 더 많은 것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비교대상이 있을 때는 쉽다. 어려운 것은 비교대상이 없을 때가 가장 어렵다. 무엇과 무엇을 비교한다는 그런 흔히 알고 있는 다른 것과 내 것의 비교보다는 내 것과 내 것의 비교. 내 속에 존재하는 나의 시적 질감과 내 밖에 존재하는 나의 시적 질감을 비교할 때, 우리는 비로소 퇴고하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내 안에서 찾는 행위는 그만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결과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허용오차의 범위는 결국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는, 많이 읽은 사람이 잘 쓴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시를 쓰는 시인이 가져야 할 지적 관용, 시의 허용오차의 범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모던 포엠 신년호에서는 이러한 필자의 허용오차의 범위를 잘 대변할 수 있는 작품 세 편을 선별하고 소개한다. 하지만 모든 이론과 가설은 결국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논리를 만들기 위한 논리를 벗어나기는 참 요원한 일이다.

 

  첫 번 째 소개할 작품은 구수영 시인의 [외줄]이다. 진천 엽돈재 숯감마을이 정확히 어디인지 필자는 모른다. 다만 구수영 시인이 묘사한 그대로 그곳의 절집엔 그리운 것이 다 그 안에 있다는 말이 다른 어떤 미사여구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단청의 빛도 다 바래지고 이제는 어느 젊은 사당패의 공연을 알리는 전광판 불빛, 그리고 시작하는 외줄 타기, 어쩌면 우리 생의 시간은 온통 외줄 타기였는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외줄, 누구나 자신의 외줄을 타고 있다. 그 외줄 위에서 넌출거리는 바람 앞에서, 때론 흔들리는 자신의 몸과 생각 앞에서 우린 과연 어떤 외줄에서 외줄로 갈아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좋은 작품이다.

 

외줄

 

구수영

 

오전 열시가

진천 엽돈재 숯감마을 지나

바우덕이 무덤가로 내려오면

서운산 아래

칠백 살도 더 산 절집이

가슴을 연다

그리운 것은 다

그 안에 있어 당신이

살아 나온 지난 천년

대웅전 단청처럼

날마다 바래가고

새로운 천년 거머쥔 젊은

사당패들의 정기공연을 알리는

전광판 불빛에

솟구치는 심장의 풀무질

무덤 문을 열고 나서는가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맨발로 걷는

외줄타기

그 길 끝에 누가 있을지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한껏 치장하고 거울 앞에

서서 다시 화장을 고치는

 

길을 가다 보면 오래 된 절집 하나 마주치는 것은 일상이다. 전국 어느 곳을 가던 낡고 오래된 절집. 낡고 오래된에 멈추면 그저 낡고 오래된 절집이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그 절집이 열어놓은 집의 가슴속에 그리운 것이 다 그 안에 있다는 시인의 표현이 공감을 불러 세운다. 그리운 것은 다 그 안에 있다는 것은 화자의 생각일 뿐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시를 읽으며 필자는 화자와 동일한 시선을 갖게 된다. 화자가 유혹하는 그리운 것은 다 그 안에 있다는 말에 현혹된다. 그렇게 읽으니 내가 지나쳐온 모든 절집에 다 그런 것 같다. 어쩌면 그리운 것은 다 내 안에 본래부터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우연하게 마주한 절집과 내가 동일화하여 그 감정을 교류한 것일지도 모를.

 

당신이

살아 나온 지난 천년

대웅전 단청처럼

날마다 바래가고

새로운 천년 거머쥔 젊은

사당패들의 정기공연을 알리는

전광판 불빛에

솟구치는 심장의 풀무질

 

살아 나온 지난 천년과 사당패들의 정기공연을 알리는 전광판 불빛의 새로운 천년. 천년과 천년 사이의 간극은 다만, 시간의 개념으로 /지나간/ 살아 나온/ 새로운 천년/이라는 공간적 개념보다는 변화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다. 글 속에 적절하게 배치한 단어들의 조합이 어떤 장면에 대한 신선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 같다. 가령,

 

대웅전 단청 = 전광판 불빛

날마다 바래가고 = 솟구치는 심장의 풀무질

 

두 개의 독립 행은 시적 심상을 환기하는 단어로 읽히고, 그런 환기한 심상이 자연스러운 질감으로 구성되어 심장의 풀무질로 이어지는 것이 화폭을 따라가는 느낌이 든다.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맨발로 걷는

외줄타기

그 길 끝에 누가 있을지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화자는 단 몇 개의 환기장치를 통해 가볍게 인생으로, 삶으로 귀착했다. 외줄은 시의 소재로 참 많이 쓰인 단어이며 앞으로도 많은 시인들에게 소재로 사용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외줄을 타고 사는 것이고, 그런 외줄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맨발로 걷는

 

그때 외줄을 타는 사람이 맨발이었는지 지금 맨발로 외줄을 타는지 필자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맨발이라는 것을 읽으며 맨발에 무조건 동의하게 된다는 것. 지극히 자연스럽게 인생, 삶의 종속에는 맨발이 어울릴 것 같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인의 작품이 [맨발]이라는 허용오차의 범위를 자연스럽게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버선 혹은 양말을 신고 외줄을 탄다면, 아니 탔다고 묘사한다면 맨발이 보여 줄 수 있는 환기성의 차이는 매우 클 것이다. 자연과 인위의 차이 같은. 같은 맥락에서 외줄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화자의 말이 맨발로 이미 시적 구성을 환기하거나 주제를 보여주었기에 와 닿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외줄의 끝엔 전광판이 있을 수도 있으며 외줄의 끝엔 또 다른 외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매우 무덤덤하게 [다시]라는 말을 사용했다.

 

한껏 치장하고 거울 앞에

서서 다시 화장을 고치는

 

주목할 것은 [다시]라는 말이다. 지금이 처음이 아니고, 지금이 끝이 아니고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쳇바퀴를 도는 것이 삶이라는 외줄이라는 것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도 한껏, 치장, 화장 = 거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구수영의 작품은 가벼움 속에 진중함을 삽입했다. 매우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공감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수사적 비만을 갖고 오지 않았다. 다만,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약간의 환기장치를 설치한 채 [다시]라는 주제어로 돌아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작품은 김민율 시인의 [시대착오적인 의자]다.

 

시대착오는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게 낡은 사고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의 시대착오는 고의적으로든 실수로든 시간적 관계를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시대착오라고 하기도 한다. 김민율의 작품은 의자와 자신을 동일 시선에 두고 변화하는 현대의 매너리즘을 비판하는 듯한 논조로 만든 작품으로 읽힌다. 누차 강조하지만 의자라는 소재의 작품은 대단히 많다. 의자를 자신과 동일시 한 작품도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김민율 시인의 의자는 독특하면서도 시인 고유의 어조와 라임을 갖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는 복고풍, Retro, 이런 말들이다. 시대를 역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착오한다는 것은 주체가 ‘나’ 이면서 동시에 ‘당신’이 될 수도 있는 말이다. 착오의 주체는 ‘나’지만 착오를 불러일으키게 된 동기는 ‘당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스스로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침몰하게 만든 원인행위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기에 본문의 내용에 좀 더 귀를 키우게 된다. 이러한 원인행위에 대한 혐의는 본문 곳곳에 적절하게 배치되어 독자의 입장에서 더 많은 수용성을 갖게 만든다.

 

시대착오적인 의자

 

김민율

 

육체는 순결한 영혼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여야만 해

 

꼭 모던한 의자가 아니어도 좋아

내게는 무릎의 옹이와 결이 자연스러운,

영혼이 앉기에 편한 나무 의자가 어울리니까

 

욕망과 쾌락뿐이 육체와 영혼이 삐걱거려

서로를 동의하지 못하는

모서리와 모서리의 관계는 슬프지

 

나무 의자는 곧은 선과 면으로 짜여진

절제된 육체의 미학이네

 

장식이 없고 심플하지

모서리와 모서리의 음악이 삐걱거리지

불협화음 틈새로

오후의 햇빛과 그늘과 새 울음이 앉았다 날아가지

 

기울어진 의자에 앉아 졸다가

연인 꿈을 꿀 때도 있네

기도하던 몇몇 밤들이 내려앉아

고독을 경배하기도 하네

 

어떤 사람은 말하지

이 의자는 모던해 보이는데

청교도적 형식과 생활과 언어와 분위기를 고집하네

 

새를 신앙하는 오늘의 뼈마디가 어긋나 삐걱거린다

 

무심코,

발끝 너머를 바라본다

 

발톱을 깎고 사뿐히,

어떤 순결한 육체의 아름다움에 앉고 싶은 걸까

 

침묵으로 앉아 듣는다

나무였을 적에

삐걱거리는 새 울음을 키우던 옛 풍습을

 

몇 부분 시선을 끄는 곳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독을 경배하기도 하네/

 

새를 신앙하는 오늘의 뼈마디가 어긋나 삐걱거린다/

 

나무 의자는 곧은 선과 면으로 짜여진

절제된 육체의 미학이네/

 

무심코,

발끝 너머를 바라본다/

 

시선을 많이 끄는 행을 한 곳에 모아 보았다. 순서 역시 시의 본문과 관계없이 필자 나름의 생각과 기준으로 정리했다. 절제된 육체의 미학과 새를 신앙하는 오늘의 뼈마디가 어긋나 삐걱거린다를 병렬로 연결하여 하나의 이미지화하여 생각하는 것, 고독을 경배와 무심코 발끝 너머를 본다를 병렬로 연결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이미지화하여 생각하는 것.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 과연 무엇이 사유되는지에 대한 몫은 독자의 몫으로 놓아둔다. 다만, 재차 밝히고 싶은 것은 이 달의 주제가 허용오차의 범위라는 점이다.

 

시는 첫 연에 답을 내리는 방식(일반적으로 사용하는...)으로 시작한다. 화자가 만든 가상의 의자는 무릎의 옹이와 결이 자연스러운, 이라는 수식을 했다. 천연 그대로, 니스를 바르거나 한 부분 깎아 내거나 나무처럼 보이는 무엇으로 포장한 것이 아닌, 나무 그대로의 나무 그러면서도 모던하지 않아도 된다는 관용을 베푼다. 첫 연에서 확정한 순결한 영혼이 앉는다는 말에 대한 부연 설명이며 앉아야 하는 것의 대상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욕망과 쾌락 = 육체와 영혼이라는 등식으로 독자를 유도하는 기술적 묘사가 돋보인다. 하지만 의자의 단점인 심플과 장식에 대한 반대급부 역시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장식이 없고 심플하지

모서리와 모서리의 음악이 삐걱거리지

불협화음 틈새로

오후의 햇빛과 그늘과 새 울음이 앉았다 날아가지

 

장식이 없고 심플하다는 것도 나름대로 좋지만 그 이유로 인해 슬픈 모서리와 모서리의 관계를 모서리와 모서리의 음악이 삐걱거리지라는 말로 슬픈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했다. 그 역시 화음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은 불협화음의 틈새라는 말로 삶의 일정 부분(인정할 수밖에 없을)을 포용했다.

 

무심코,

발끝 너머를 바라본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노림수는 자기변명이 아닌, 자기주장 쪽에 더 가까운 자신이 갖고 있는 명제에 대한 해석을 내린다. 그 명제의 답을 의뭉하게 결구에 던져둔다.

 

나무였을 적에

삐걱거리는 새 울음을 키우던 옛 풍습을/

 

시의 본문에서 삐걱거리는 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목된다. 음악이 삐걱, 어긋난 뼈마디가 삐걱, 삐걱거리는 새 울음. 각각의 삐걱은 서로 묘하게 같은 일치와 묘하게 다른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에 착안해 시를 읽으면 화자가 시의 구성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자연스럽게 읽히면서도 배후에 공존하는 삐걱의 의미를 새삼 되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일독한 후 머리에 남는 것은

 

서로를 동의하지 못하는

모서리와 모서리의 관계는 슬프지/

 

아마, 우리는 살면서 동의하지 못하는 서로를 많이 만들거나 만나거나 발생하거나 조우하거나 할 것이다. 그중 가장 동의하지 못하는 서로는 나와 나의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그러면서도 가장 이해하고 사랑해야 하고, 서로 앉아 쉴 수 있는 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나’라는 의자 아닐까?

 

 

마지막 작품은 정우림 시인의 [알 수도 있는 사람]이다. 알 수도 있는 사람은 지금은 모르지만 언제 어디선가 본 듯, 혹은 관계가 맺어진 듯, 혹은 우연히 스쳐 지난 듯, 사소한 인연이라도 지나갔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정우림의 시는 그런 이웃 혹은 지인들과의 관계보다는 요즘 시대의 가짜 소통(필자의 말임), 요즘 시대의 눈 SNS, 혹은 Face book의 소통과 관계에 대한 의미와 그 의미의 작용, 반작용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우리말에 얼굴 보고 이야기 하자라는 말이 있다. 전화 혹은 문자로 해도 되겠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의 진위를 보려면 표정을 보고, 말하는 입모양을 보고, 느낌을 보고, 그 날의 분위기를 보고, 좀 더 가깝게 호흡을 읽고,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람 냄새를 맡아야 더 정확한 진정을 느끼는 것이 맞을 듯하다. 하지만 요즘 시대는 글의 표정을 읽어야 한다. 같은 글이라도 글의 표정을 짐작하지 못하면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 점을 보완하고자 이모티콘이 유행하고 불티나게 팔리는지도 모른다. 얼굴을 보기 전, 글에서 보는 사람은 정우림 시인의 작품 제목처럼 알 수 도 있는 사람에 불과한, 관계가 한정 지어지는 그런 다소 모호한 설정이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하는 요즘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변명이라는 다소 생경한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알 수도 있는 사람

 

정우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묻는 질문입니다

 

비밀번호를 만들고 연락처를 삭제하고

다시는 만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른 척 지나쳐야겠습니다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나를 지켜보나 봅니다

어떤 이웃집은 문을 열지 않고 얼굴만 보여줍니다

창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싶습니다

 

그리운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하신가요?

 

친구의 친구 그 건너 친구의 친구는 물어봅니다

함께 놀지도 않고 함께 웃지도 않고 낯이 빨개지는 추억도 없는

친구가 친한 척 사귀자고 합니다

 

추운 나라와 더운 나라의 표정을 사랑해도 될까요?

 

잘 모르는 것이 미안해서 ‘좋아요’를 자꾸 누르게 됩니다

사실 숨어 있다가 매일 나타나는 사람은

저입니다.

 

여기서 문은 일종의 문의 역할보다는 관계로의 진입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진입에 있어 문을 여는 행위는 자신의 행위이면서 또 다른 타인의 행위와 병렬이라는 두 개의 의미를 가질 것 같다. 문을 여는 행위, 열고 들어가는 행위는 이미 또 다른 타인이 문을 열어 두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 문이라는 것에 비밀번호를 걸거나 연락처를 삭제하거나 하면서도 결국 상대의 대응되는 행위를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나를 지켜보나 봅니다

어떤 이웃집은 문을 열지 않고 얼굴만 보여줍니다

창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싶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를 지켜보는 것은 오래되었다. 거리의 CCTV, 풍경을 찍는 어느 사진사의 한 컷에 소품으로, 어느 홍보용 책자의 앨범 속 지나가는 사람으로, 원하지 않은 소품이 되어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 나만 소품이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될 때가 많다. 창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린 것이 아니라. 내리고 싶다는 것은 내릴 수 없는 관계에 대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관계가 한정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상대의 한정에 대응하는 나의 한정은 최소한 상대보다 두 배 이상 두껍게 될 것이기에.

 

함께 놀지도 않고 함께 웃지도 않고 낯이 빨개지는 추억도 없는

친구가 친한 척 사귀자고 합니다/

 

친한 척/ 놀지도 웃지도/ 낯이 빨개지는 추억도 공유하지 못한 채 우리는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맺고 친구가 되고, 별 풍선도 쏘고, 익명이 익명을 만들어 놓은 익명에게 다시 익명이 되는 그런 요즘 현대사회의 관계라는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관계의 한계는 시인의 결구와 같을 것이다.

 

사실 숨어 있다가 매일 나타나는 사람은

저입니다.

 

작품의 모두와 말미가 모두 아릿한 요소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문’이라는 것에 대해 그 상징성에 대해, 문의 문에 대해 지나온 것을 생각하거나 지나갈 것을 추적하거나, 다가올 것을 다시 상기하거나, 쉬운 말로 표현한 어려운 사유의 깊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2019년이 갔다. 새해가 왔다. 새해가 왔다는 말을 이 코너에서 다섯 번째 하고 있다. 올 해는 그동안의 글을 묶어 평론집을 한 권 출간했다. 책이 나온 기쁨보다는 앞으로 나올 책을 위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무겁게 든다. 2020년 새해에는 아무 특별한 일 없이 그저 평범하고 별 일 없는 한 해가 되는 것이 필자의 소망이다. 오랜 기간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좀 더 많은 것을 나누는 코너가 되면 좋겠다. 새해를 축복하며 여러분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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