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묵비 /최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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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북수유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05회 작성일 20-03-02 09:08본문
다시, 묵비
최명란
이승의 일
저승 가서도 고자질 마라
당장 잡혀갈 놈 수두룩하다
저승 가면
어떤 일도 말하지 말라고
아무 것도 일러주지 말라고
그들은
솜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말 날까봐 소리 새어 나올까봐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막았다
나는 죽었다
증거 인멸을 위하여
내 주검 속에 들어 있는
그 많은……
말 못할 사리들
―시집『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랜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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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비란 비밀로 하여 말하지 않음인데 사람들은 가슴속에 말못할 사리를 몇 개쯤 가지고 있을까요. 사리가 되기까지 희열보다 고통이 따랐을 것인데 사찰에 가보면 여러 전각 중에 명부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이승에서 있었던 일들을 판가름하여 죄가 나누어진다 합니다. 명부전에 가서 고자질하면 아마 당장 잡혀갈 사람 무지 많을 것입니다. 아무리 안 먹었다고 우겨봐도 사리가 있으니 들통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반칠환 시인은 '먹은 죄' 라는 시에서 새매가 지빠귀를 물어가고 물총새가 잠자리를 꿀꺽해도 유족들이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살아오면서 증거를 가지고 있고 고자질 할 게 많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먹은 죄가 있어 입이 스멀거려도 말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두 입술을 꽉 깨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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