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중립을 위하여/ 환지통, 마경덕 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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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540회 작성일 20-05-26 08:03본문
[평론] 중립을 위하여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 오늘 오후 / 이재연
* 정장 씨와 추리닝 씨/ 한명원
* 환지통 / 마경덕
‘봄은 오겠지만 그 뒤에 겨울이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니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이 올 해는 유독 다가온다. 코로나 바이러스 인해 사람들의 가슴에서 봄이 왔는지 갔는지 다음 계절이 시작했는지 감각조차 무디어진 상태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어쩌면 계절에 대한 실종에서 비롯된 집단 코마 상태가 온 것 같은 요즘이다. 4월호 평론 말미에 이렇게 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자제하고 참고 질병관리 본부의 정책에 잘 따르면 목련이 만개할 즈음, 백색 그 꽃의 끄덕거림에 마냥 즐거울 봄날이 올 것이다.」
지난달, 모던포엠의 200호 발행 기념 편집으로 인해 한 달을 쉬고, 그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나갔다. 여전히 코로나는 진행 중이다. 잠잠하던 확진자 추세가 이태원발 증가폭이 심상치 않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시를 쓰고, 읽고 있다. 시는 힐링이며,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매력적 문학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멈칫하거나 주저앉아 가만히 세월을 당기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멈칫과 주저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과 ‘사유’를 반추하거나 성찰하는 시간이야 말로 스스로 존재한다는 그 존재론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달의 소제목을 중립이라고 정했다. 치우친 것도 과장된 것도 아닌, 중립은 중간적 입장이다. 시를 쓰다 보면 그 속에서도 여러 장르, 혹은 메타포를 갖게 된다. 때론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서정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심미주의 이거나 이미지즘 적이거나 환상적이거나, 등등의 많은 사유의 모티브를 발견하게 된다. 발견은 시를 읽으면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시를 쓰면서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던 자신도 몰랐던 감각의 재발견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우리는 종종 글을 쓰다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써 놓은 글을 한참이나 지나 우연히 읽게 되면 내가 언제 이런 글을 썼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더 나아가 내가 이런 단어를 알았나? 내가 이런 구상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의 글인데도 마냥 어색하기만 한 자신의 글을 대할 때마다 듬성듬성 드는 묘한 의문들. 필자는 이런 의문의 연원을 재발견에 두고 싶다. 일상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철학과 사유와 성찰의 두께와 부피에 당혹할 때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나를 재발견하는 것을 느낀다.
다시 중립이라는 소제목의 논리로 돌아가 본다. 시를 쓰거나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진 작품들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이 삶의 한 단면이든, 생의 전면이든,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어설픈 집착이든, 곡진하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조차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이유를 생각해 본다. 시는 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공감의 영역을 독자라는 불특정 다수와 나누고 교류하고 감응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드러난 모든 것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것은 좋다. 우리는 그것을 진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진정성에만 바탕을 둔다면 진정한 시문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전에 발표한 평론에서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문학적 진정성이라는 것은 진정성에 맞춤한 포장이 적절하게 되어 있을 때 더 많은 조명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환언하면 진정성을 꾸며줄 수 있는 부사, 형용사, 동사, 주제, 소재, 구성들이 올바른 자리에 놓여 있을 때 그 진정성의 빛이 돋보이는 것 아닐까?
매 달 수 백 편의 시를 읽는다. 몇 권의 문예지에 발표한 신작 시들을 읽는다. 제목을 보고 작가의 이름값을 보고 , 프로필을 보고 시를 읽기 시작한다면 독자의 뇌 속에는 이미 선입견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상 당선자, **문예 당선자, ** 시집을 몇 권이나 썼네 하면서 꽤 긴 프로필을 먼저 본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것은 이미 좋은 시라는 개념을 총알처럼 머리에 박아 놓고 시를 읽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시를 읽는 것인가? 프로필을 읽는 것인가? 중립을 놓치는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름도, 프로필도 없이 다만, [시]만 놓고 시를 읽는다면 시의 맛이 어떨까? 필자는 종종 생각해 본다. 모든 문예지에 발표하는 작품들에서 작가의 이름과 프로필과 사진을 빼고 시만 발표하면 어떨지? 맨 뒷장에 발표한 시에 대한 작가 이름과 프로필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방식은 어떨지? 얼마 전 어느 동인에서 발간한 시집을 대한 적이 있다. 시만 있었다. 뒷장에 이름과 함께. 적어도 시를 읽을 때는 누구의 작품인지, 어느 이름값의 작품인지, 어느 문학상의 작품인지에 대한 선입견이 없이 시를 읽을 때, 그 신선함의 무게는 상당했다. 시에서 중립이란, 적어도 독자의 입장에서 중립이란 시만 보여야 하고 시만 읽어야 하고 시만 교류해야 그 맛이 싱그러울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제법 무게가 나가는 이름이 가진 작품의 난해함에 대하여는 내가 이해를 못한다고 생각을 할 것이며, 아마추어 작가의 작품이 난해하면 ‘ 이 친구 아직 멀었구먼!’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 평가를 거친 것에 대한 관대한 포용이라고 정의해 본다. 중립이라는 것은 의식적이라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타인에 대한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때 중립이 지켜지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쓸 때의 중립은 위에서 언급한 이름값에 대한 비만과 지방, 기름기를 쫘악 뺄 때 중립이 되지 않을까? 자칫 과도한 독선으로 흐를 수 있는 소재와 주제와 현상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에 치우치는 것은 아닐까? 성급한 결론이나 전 세계를 포괄한다는 식의 공상화한 상상을 혼합하여 시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단어를 과감하게 시에 비벼 혼탁한 비빔밥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와 문장만을 찾아 뷔페식 화려함만을 쓰고, 적고, 다루며 그것을 시라고 세상에 내어 놓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이라는 말은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책을 시라고 한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문제는 어떤 시를 많이 읽고 어떤 교양을 쌓을 것인지, 어떤 문자를 사용하면 어떤 향기가 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할 것이다.
꽃은 향기를 품기 위해 겨울이라는 고단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씨앗이 발아하여 싹이 돋아나고, 파릇한 잎이 나오는 과정을 지나야 비로소 꽃이라는 아름다움이 세상에 피어나고 그 꽃이 발산하는 그윽한 향기에 취하게 되는 것이며, 향기와 더불어 꽃을 감상하는 우리들에게 봄의 진정성을 가득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는 한 편의 꽃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너무 많은 수분을 섭취하거나, 너무 많은 빛을 쪼이면 금세 시들어 버리거나 개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묵히다’라는 말이 있다. 일정한 때를 지나서 오래되게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다른 말로 발효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방금 담근 겉절이도 맛있지만 묵히고 오래 발효한 묵은지의 깊은 맛은 시간과 세월이 만든 것이다. 오늘 심어 내일 개화하는 꽃은 없을 것이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의 중립을 논하면 묵히라는 것이다. 어느 지점과 어느 지점이 만나 더 이상 다른 지점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묵히다 보면 기다리던 향이 날 때가 있다. 퇴고의 과정이다. 시에서 중립이라는 말은 퇴고의 과정을 말한다. 소재나 주제에 대한 중립도 중요하지만, 진정성도 매우 중요하지만, 시는 묵히는 과정이 생략되거나 없다면 향기가 나지 않는다. 잘 썼지만 잘 쓴 글이 아니다. 극단적인 비유일지 모르지만, 산딸기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딸기의 맛과 같은 차이라면 맞을 듯하다.
어느 한 지점에 머물기는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 지점과 한 지점의 교차점을 선택한 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중립, 가운데, 중도, 중간이라는 말은 타협점이다. 시 문장에서 자신과 자신, 독자와 자신, 독자와 독자의 입장, 시 한 편엔 여러 모습의 입장들이 얽혀 있다. 우린 시인이면서 또 하나의 독자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자주 그 입장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다. 시를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입장은 같을 수 없지만 같아야 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시인이면서 독자라는 독특한 입장의 중간지점을 필자는 중립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를 쓸 때는 가장 주관적으로 쓰지만 퇴고할 때는 가장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 지점이 중립지대다. 시는 주관의 시인성과 성찰을 객관의 감응으로 치환하는 것일 수 있다. 흔히 시는 발표하면 독자의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발표 전, 독자의 것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작품을 볼 수 있다면 정확하게 중립을 지키기 쉬울 수 있다. 시인의 관점과 독자의 관점, 그 중간을 퇴고의 과정이라고 하며, 어쩌면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동기감응(同氣感應)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제천 시인의 시와 시인, 그리고 독자들이라는 제언 중 일부를 소개한다.
「시란 무엇인가. 여기 대해서는 역사 이래로 수많은 답이 마련돼 있다. 그 답안을 읽는 일은 어찌 보면 시문학사 전체를 섭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시인된 자는 거의 누구나 이 질문에 매력을 갖고, 자문자답해 보기 때문이다. 하늘의 성좌도를 바라보듯, 그 답안들은 시인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휘황하게 빛난다.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칠 만한 답안도 있고, 그 답안을 화두 삼아 하염없이 빠져들 만큼 황홀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그 수많은 답안 중에서도 엘리엇이 말한 ‘시에 대한 정의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의’가 가장 고전적인 모범 답안으로 꼽힌다.
시인들은 누구나 시란 그 무엇이 아닐까 궁리하고, 거기서 얻은 깨우침을 한 편의 시로 써나간다. 다시 말해 시인들은 평생에 걸쳐 그들이 찾아 헤매고, 꿈꾸며 느끼고 깨우치는 시를 써나간다. 작품 한편 한편이 그 순간순간 시인이 찾아낸, 시에 대한 최선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시에 대한 누군가의 특별한 정의에 시인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엘리엇의 정의는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들, 시란 무엇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상의 화두로 남아 있다.
‘시에 대한 정의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의’로 요약된 이 모범 답안은 대체로 시인들을 만족시키고 있지만 일반 독자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답안이다. 다시 말해 시에 대한 전문적인 정의이기에 다만 시가 무엇인지 궁금한 일반 독자의 궁금증까지 채워주지는 못한다. 시의 정의에 관한 독자용의 해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가 무엇이고, 시를 읽으면 무엇을 배우거나 즐기는지, 무엇을 얻거나 깨우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단순한 독자들의 궁금증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 문제를 단번에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논리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대해 솔직하게 정의를 내린 몇몇 작품들 중에 그 해답이 있을 수는 있다.」
중략
미당 서정주는 시란 “님 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바다 속에 남겨 놓은 제일 좋은 전복”이라고 제주 해녀를 빗대어 말한다. 그 좋은 시를 ‘바다 속에 두고서, 바다를 바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다 캐어낼 수‘도 없지만, 아끼고 아끼는 그 마음이 시라는 생각은 공자의 ‘시즉절(詩卽切)’, 쓰고 싶은 것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이 시’라는 생각과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시란 무엇이고, 시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그와 상관없이 나는 오늘 또 한편의 시를 무심히 써나갈 것이다.
「시와 시인, 그리고 독자들 - 박제천」일부 인용
이 달의 소제목인 [중도, 중간, 가운데, 중립을 위하여]을 생각하며 세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첫 번 째 소개할 작품은 이재연의 [오늘 오후]라는 작품이다. 코로나가 창궐한 요즘 이전의 일상이 눈물겹게 그립다. 일상이라는 말은 그저 일상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은 삶이었으며 이웃이었으며 시간이었으며 같이 공유할 시간의 중립지대였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에 대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작가의 일상에 대한 세계관과 작가가 그려놓은 주관적 의식세계 속에서 독자적 입장으로 치환하여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행간에 숨어있는 좋은 작품이다.
오늘 오후
이재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사라질 때쯤 흙을 사온다
있는 병은 달래서 멀리 보내고
가지들의 웃자란 자유도 잘라준다
정하지 않은 시간에 창문을 열고
바람은 바람에게 세 들어 살게 하고
색은 색과 더불어 살게 한다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더는 없어
아무도 모르게 찾아 들어오는
햇빛 속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휘어지는 줄기와
가느다란 모가지를
한나절이나 바라보며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먼 곳으로 가겠다는 꿈을 꾸지 않는다
멀어지는 것도 다가오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어서
손을 깨끗이 씻고 싶은 일은 더 이상 없어
내일은 흙을 좀 더 사와야겠다
작품은 한 편의 수묵화 같은 느낌을 준다. 정갈하고 담백하고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삶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어쩌면 필자의 이번 달 소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중립의 작품인 것 같다. 시 속의 언어들은 정제되고 다시 한번 더 정제되어 불필요한 문장이나 행간이 없다. 유화를 그릴 때 Knife로 그리면 다소 거칠지만 선이 살아있어 생명력을 더 느끼게 한다. 반면 붓으로 터치한 유화는 세밀하지만 질감이 풍성하다. 이재연의 작품은 붓으로 터치한 느낌이 든다. 자를 들어 풍경을 재어보고 투박하게 스케치를 한 후, 물감을 듬뿍 담아 풍경을 그려낸 느낌이 든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시인의 의식을 담아 시인만의 질감으로 완성한 유화 같은 작품. 그 질감을 완성하기 위해 시인은 오래도록 풍경을 보고 그 풍경의 어느 한 컷을 자신에게 대입해 가슴이 지정하는 물감과 의식이 지정하는 물감을 혼합해 완성된 그림. 그림에 문외한인 필자는 유화를 감상할 때 몇 걸음 뒤에서 그림을 본다. 뒤로 물러날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삶의 풍경. 가까이에서 보는 유화는 어쩐지 질곡의 시간이 거칠게 보여 선호하지 않는다. 어쩌면 삶의 방식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더는 없어
이 연에서 필자는 삶의 방식을 꺼내게 된다. 쉽게 처리한다면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라고 할 것을, 시인의 방점은 나쁜 것에 두었다. 나쁜 것도 [더는] 없어 라는 말속에 숨어있는 시인의 자의식은 시의 형태적 방정식의 모범을 보여주는 듯하다. 평이한 글 속에 숨어있는 관조의 시각과 의식의 변화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사라질 때쯤 흙을 사온다
손을 깨끗이 씻고 싶은 일은 더 이상 없어
내일은 흙을 좀 더 사 와야겠다
첫 연의 시작과 마지막 연의 마무리가 담백하다. 원인과 결과 관계를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조밀하게 엮는다. [흙]이라는 소재와 [밖]이라는 소재, 두 개의 관계물을 갖고 시를 추론해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듯하다. 흙은 밖이면서도 안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며 흙이 의미하는 것과 밖이 의미하는 것으로 구성한 시의 구성적 역량을 살펴보는 것도 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먼 곳으로 가겠다는 꿈을 꾸지 않는다
멀어지는 것도 다가오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어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한순간의 일이라는 문장이다. 멀어지는 것, 다가오는 것, 흙, 밖, 이 모든 것을 수렴하는 문장이 결구의 내일은 흙을 좀 더 사와야겠다는 것의 인식 기반이 선명하게 보여서 좋다. 세상 모든 일은 한순간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과, 나가지 못하는 것, 안과 밖의 경계선은 마음속에 있다는 것. 어쩌면 경계라는 것은 마음이 구분해 놓은 속박 혹은 구속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를 어렵게 쓰는 것은 쉽다. 하지만 시를 쉽게 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의 성장통을 겪었다는 말과 같다.
두 번 째 소개할 작품은 한명원의 [정장 씨와 추리닝 씨]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최대한 쉽게 기술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시를 읽으며 시인이 의도한 질감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시의 많은 작품들이 혼돈을 추구하는 것 같은 요즘, 문장을 구성하거나 선택함에 있어 쌓아 온 내공의 깊이에 따라 뒤로 물러날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유화 같은 느낌의 글이 된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 하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기까지 시인이 보낸 시간의 깊이가 웅숭깊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작품은 마치 눈앞에 보이는 [나]를 보는 듯하다. 작금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청년문제, 실업문제, 취업문제, 청년이 아닌 장년이라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마치 거울을 보고 그리듯 약간의 희화를 섞어 그려낸 작품이다.
정장 씨와 추리닝 씨
한명원
이력의 기술을 적는 법을 수백 장 연습한다
눈치 잘 보는 법, 거울을 보며 웃는 법
잘생긴 대답, 아이오우, 아이오우
랩(rap)처럼 둥근 소리가 창문을 흔들고
수만 가지 얼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평상시를 함께 하지 못하는 정장 씨
추리닝 씨의 얼굴에 다른 가면을 쓰고
면접 번호를 받는다
머리를 쪼고 쪼며 연습 한 대로, 침착하게
요령을 찾고 말의 대역을 찾는다
방안에는 정장 씨와 반듯한 면접 씨와
헐렁한 추리닝 씨가 공존한다
정장 씨 오늘따라 추리닝 씨와 닮지 않은
과거를 뱉으며 확신에 찬 미래를 위해
몸을 날리며 면접 씨가 된다
눈빛은 상대의 눈을 뚫어버릴 듯하다
이력의 기술을 (rap)처럼
본문 24페이지에서 34페이지 사이에
기록하고 종이 한 장이 넘어간다
본문 두 장, 세장이 넘어가도
스펙만 여전히 쌓고 있다고 기록된다
정장과 추리닝의 상관관계, 남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흔히 예비군 훈련장에 훈련하러 가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사회생활에서는 정중하게 보이거나 진지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예비군 훈련장에 군복을 입고 가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것이 생각의 문제인지 유니폼의 문제인지. 아니면 집단의 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두 개 이상의 얼굴을 갖고 있다. 상황이나 시간, 환경, 타인 등등의 이유로 인하여 변검(變臉) 하듯 얼굴을 바꿔야 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 바꾸는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래야 하는 현실을 갖고 사는 것이 부담이라면 부담일 것이다.
시인은 정장과 추리닝의 상관관계를 빗대 삶을 인식하는 우리들의 가치관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주고 있다. 정장, 추리닝, 면접, 스펙, 그리고 랩 (Rab), 이 모든 일상의 방향성은 하나로 치달리고 있다.
이력의 기술을 (rap)처럼
본문 24페이지에서 34페이지 사이에
기록하고 종이 한 장이 넘어간다
본문 두 장, 세장이 넘어가도
스펙만 여전히 쌓고 있다고 기록된다
스펙만 여전히 쌓고 있다고 기록된다는 문장에서 요즘의 경제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스펙은 학력, 학점, 자격증 등속의 객관적 평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인성인데 스펙만 쌓여간다는 말은 인성과 스펙이라는 것으로 대비하여 추론할 수 있으며 동시에 스펙이라는 것의 몰가치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안에는 정장 씨와 반듯한 면접 씨와
헐렁한 추리닝 씨가 공존한다
정장 씨와 면접 씨와 추리닝 씨의 공존은 나와 나와 나다. 눈에 힘을 줘야 하는 나와, 눈이 풀려야 하는 나와 상대의 눈빛을 뚫어버릴 듯한 내가 동시에 공존하는 방안. 면접관이 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정장 씨와 그 속의 추리닝 씨를 연상해 보면 시인이 의도하는 구술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력의 기술이라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스펙은 결국 이력의 기술이며 동시에 랩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이력의 기술을 적는 법을 수백 장 연습한다
첫 연의 시작이다.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이력의 기술이라는 말이다. 시 역시 이력의 기술이 있어야 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주지할 것은 스펙이 아닌, 이력의 기술이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스펙 = 이력의 기술 일 수 있으나, 필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삶 = 이력의 기술이라는 등식으로 읽게 된다. 바로 이런 독자의 독법이 중립적이라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평상시를 함께 하지 못하는 정장 씨
추리닝 씨의 얼굴에 다른 가면을 쓰고
면접 번호를 받는다
머리를 쪼고 쪼며 연습 한 대로, 침착하게
요령을 찾고 말의 대역을 찾는다
잘 짜인 행간을 읽으며 다소의 서글픔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필자만의 오독일까? 그것이 취업을 위한 면접 장소가 아닌, 삶의 단면들 속에 부가된 또 다른 장소들의 연속이라면, 아니 그렇게 생각이 든다면 삶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평상시를 함께 하지 못하는 정장 씨의 입장에서, 말의 대역을 찾는 정장 씨의 입장에서, 연습한 대로, 침착하게 살고 있는 삶의 모든 ** 앞에서 라는 것이 어쩌면 시를 쓰게 만드는 정확한 동기가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행간의 문장 하나를 소개하며 두 번째 작품 소개를 마친다.
정장 씨 오늘따라 추리닝 씨와 닮지 않은
과거를 뱉으며 확신에 찬 미래를 위해
세 번째 소개할 작품은 마경덕의 [환지통]이라는 작품이다. 환지통은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이미 없는 수족에 아픔과 저림을 느낀다는 말이다. 16세기 프랑스 군의관이 처음 발견하였으며 19세기 미첼에 의해 환지통이라는 병의 용어와 양상들이 밝혀졌다고 한다. 환지통의 증상으로는 절단 전 느꼈던 통증과 유사하며, 칼로 찌르는 듯하거나 불타는 듯한 등의 다양한 통증이 있다고 한다. 의학적 원인은 몇 가지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지가 절단된 이후 발생한 스트레스의 조절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경우 발생한다는 것이 하나의 정설이다. 작품은 나뭇가지의 절단에서 출발 해 자연스럽게 오래전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홀아비로 비유했다. 거창하거나 거대한 의미와 의식을 작품에 담는 방식이 아닌, 오래전 죽은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홀아비에서 환지통과 삶을 대입했다. 비유는 선선하며 이해하기 쉽게 처리되어 이 작품 역시 시인의 내공의 깊이를 배우게 한다.
환지통
마경덕
잘린 나무는 어떻게 긴 밤을 견디는 것일까
없는 가지가 사무쳐 온몸으로 벅벅 허공을 긁는다는 말, 허공이 욱신거려
손목이 돋는 봄을 기다린다는 말
이것은 손톱에 때가 낀 나무들만 아는 이야기가 아니다
피가 나게 허공을 긁어본
보기 좋은 나무들은 손목이 없다
그들이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마취제일까 진통제일까
교통사고를 당한 사내도 다리가 아파 못살겠다고
없는 다리를 만지며 엉엉 운다
의사가 말했다
사라진 다리를 기억하는 것은 뇌라고
걷고 달리고 걷어차던 습관을 뇌는 아직도 붙잡고 있는 거라고
오래전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홀아비도
없는 자식이 그토록 아프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처럼,
없는 다리가 아프고
없는 자식이 또 아프다
치장을 마친 정원의 나무들이 동쪽 허공을 문지르며 우는 법이다
필자의 눈길을 끈 문장은 없는 다리가 아프고, 없는 자식이 또 아프다는 말이다. 최근 많은 사회적 사고들 속에서 아까운 젊은 청춘들이 부질없이 사라지는 것을 접한다. 그럴 때마다 남아있는 사람의 몫을 생각하게 된다. 보내고 남아있는 사람의 아픔은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듯 ‘차라리 내가 갈 것을...’이다. 그만큼 남아있는 사람의 몫이 더 큰 법이다. 나무는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시인은 나무에게도 아픔이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시를 기술한다. 주지하지만 이것이 시의 세계화라는 것이다. 유, 무생물에서 동질성을 느낀다는 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의 바탕은 상상력에 있으며 상상력은 몰아적 동일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생각에서 출발한 상상력이 홀아비로 자연스럽게 전이되거나 이어질 때 작품의 완성도는 극대화하는 것이다.
잘린 나무는 어떻게 긴 밤을 견디는 것일까
교통사고를 당한 사내도 다리가 아파 못살겠다고
없는 다리를 만지며 엉엉 운다
사라진 다리를 기억하는 것은 뇌라고
오래전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홀아비도
없는 자식이 그토록 아프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처럼,
몇몇의 행간을 따로 떼어내 읽으면 시인의 의도를 이해하기 쉽다.
시인의 깊이를 보여주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라진 다리를 기억하는 것은 뇌라고
살아있는 것처럼,
단독 연으로 처리한 부분, 살아있는 것처럼/ 이 지점에서 시인의 삶에 대한 연민의 깊이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공부가 된다. 밀고 당기는 문장들도 점철된 다수의 작품들에서 느끼지 못하는 간결한 메타포가 커다란 울림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는 여러 문장을 미끼처럼 던지거나 독자와의 밀고 당기는 것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아주 가끔은 하나의 행간에서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경덕의 작품은 능숙하게 농익은 느낌을 준다.
6월이다. 다시 6월이다. 6월 뒤에 어떤 계절이 숨어 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떤 계절이 오든 침착하게 해왔던 대로 살아왔던 대로 준비하고 살면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다. 세계적인 유행병 코로나로 인해 몸과 마음이 다 지쳐간다. 이럴 때일수록 시를 써 보자.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는, 힐링이 되는, 힘겨운 부분들을 이겨낼 수 있는 박수를 보내듯, 시를 써 보자. 시 속에는 코로나보다 더 강력한 삶의 따듯함이 존재한다. 독자 여러분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드린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댓글목록
魔皇이강철님의 댓글
魔皇이강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