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어떤 그릇에 담을 것인가 - 장작/ 박미라 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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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720회 작성일 20-06-30 08:09본문
[평론] 어떤 그릇에 담을 것인가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 장작/ 박미라
* 버려지는 것들/ 김석
* 아무도 없는 바깥 / 박복영
봄의 품속인 줄 알았는데 잠을 깨고 보니 여름이다. 섭리 攝理라는 말이 있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 혹은 법칙을 지칭하는 말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하는 자연계의 법칙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올해는 섭리 속에서 조금은 다른 봄이 왔다. 이른바 실종 증후군이 진행 중이다. 그저 평범하게만 생각했던 일상이라는 것의 새로운 부분을 발견한 것 같다. 어떤 분의 말씀처럼 별일 없다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의 의미를 코로나로 인해 새롭게 조망하게 된 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 곱씹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앞만 보고 달려오다 제동장치를 통해 삶의 단면들을 되돌아볼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의 섭리 중 가장 큰 섭리는 필자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고 생각한다. 생각하기 따라 앉은 곳이 천국이며 지옥일 수 있다는 말이다. 코로나 19의 팬데믹 현상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속 거리두기 등등의 일종의 사회적 감금 상태가 진화하여 코로나 블루라는 정신병리학적 양태로 까지 번지는 주변을 보며 글, 시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힐링이 되는지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필자가 늘 강조하는 것은 성찰이다. 자신의 일을 깊이 새겨 살펴보는 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살펴본다는 말이 중요하다. 그저 휙 눈으로 지나치거나 설렁설렁 보는 일이 아닌 진중한 눈으로 살펴본다는 말은 반성에 한계를 두는 것이 아니라 미래라는 가치에 방점을 찍는 것이라는 말이다. 과거, 현재를 돌아봄으로 인해 이전보다 나은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는 것을 성찰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성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혜안이다. 慧眼은 자신을 꿰뚫어 보는 깊은 눈이다. 잘하고 못하고의 규칙적인 판단의 잣대가 아니라 어디로부터 라는 화두를 살피는 눈이다. 근원을 파악하고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미 단정된 결과에 대한 체념이나 헛된 망상이 아닌 그 모든 행위의 근본을 파악하는 것은 미래지향적 사고를 유연하게 만드는 모티프가 될 것이다. 시를 짓는다는 행위가 그렇다. 말의 근원, 관계의 근원, 행동 양식의 근원, 관계의 시작점, 사랑, 증오, 미움, 용서, 배려, 이해의 근원을 주목하게 되면 부정적인 판단의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를 포함한 모든 글의 대원칙을 섭리와 성찰과 혜안에 기초하여 짓는다면 글의 문자향은 그윽할 것이며 사람의 향기는 따듯할 것이다. 필자는 이런 것들을 시에 대한 예의라고 규정짓고 싶다. 시는 일반적 언술이 아닌 사고와 지성의 산물이다. 사고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처럼 존재 의미를 사람보다는 ‘인간’에 두고 산다면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싶다.
이번 달의 글제를 어떤 그릇에 담을 것인가로 정했다. 서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가 그렇다. ‘그릇’이다. 일단 그릇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요약해 본다.
가. 물건이나 음식을 담는 도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나. 일을 해 나갈 만한 도량이나 능력
다. 수 관형사 뒤에서 의존적 용법으로 쓰여 ‘그릇’에 담아 그 분량을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
위 가, 나, 다를 자세히 살펴보면 무엇인가를 담는 것을 그릇이라고 한다. 아주 평이한 말이며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쉬운 말이다.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며 무엇에든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평이한 말이기 때문에 그릇을 쉽게 생각한다. 시를 하나의 그릇이라고 생각해 본다. 시라는 그릇에 뭔가 담아야 하는데 우린 과연 그 그릇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습득한 지식? 누적된 통계? 관념 흉내 내기? 잔뜩 기시감이 들어간 우아한 문장의 춤사위? 어쩌면 우리는 그릇이라는 말속에 담긴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현혹되어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시인 본인이 그릇 그 자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라는 그릇에 무언가를 담을 궁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라는 생각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시에 무언가를 담으려고만 하면 시는 설명문이 되고, 감상문이 되고, 논리가 되고, 소개글이 될 한계에 봉착할 수 있다. 그릇에 대한 사전적 의미의 (가)항이 그렇다. 물건이나 음식을 담는 도구라는 한계를 가진 그릇은 물건이나 음식이 담겨있지 않으면 그저 빈 그릇이다. 의존적 용법으로 사용되는 그릇이다. 하지만 (나)항은 좀 더 깊은 의미의 그릇에 해당된다. 일을 해 나갈 만한 도량이나 능력을 그릇이라고 하다. 다시 말하면 시 농사를 지을만한 도량이나 능력이 된다는 말이며, 자신을 그렇게 수양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도자기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보자. 흙은 선택하고 물레에 돌려 모양을 만들고 고온의 가마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낸 청자 혹은 백자의 빛깔은 팔레트에 놓여있는 물감의 색으로 흉내 낼 수 있는 색이 아니다. 기계 틀에 넣고 반죽을 붓고 쉽게 만드는 그릇조차 상당한 수고가 들어가야 하는데 하물며 오묘한 빛깔의 도자기를 굽는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와 공부가 필요한 일이다.
이전에 우매한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소설, 수필, 평론, 동시, 시조, 희곡, 시 중에서 가장 짧고 간단한 것이 시라서 시를 선택했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은 너무 길어서 쓸 용기나 자신이 없는데 시는 매우 짧고 짧은 가운데 몇 마디 어려운 말(어려운 말의 정의를 모르겠다.)이나 단어를 넣고 적당하게 비비면 쓸만한 작품이 될 것 같아서, 손쉬워서 시 쓰기를 택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이런 의견에 펄쩍 뛰면서도 미필적 고의처럼 인식하는 독자도 상당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필자의 판단도 변명처럼 두고 간다. 정말 그런 분이 한 분이라도 있다면 그분은 글쓰기를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것이 맞다.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시에 대한 예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생각은 그릇 이전의 단계, 흙이다. 바로 그런 우려스러운 부분으로 인해 시인이라는 그릇을 화두로 두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라는 그릇은 질감이 화려하지도 않으나 빛깔이 있어야 하며 쉽게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아야 할 ‘강도’도 갖고 있어야 하며 무엇이라도 담아낼 용기가 있어야 하며 고온 속에서도 견뎌내는 인내가 더욱 필요할 것이며 좌고우면의 엉성함이 아닌, 성찰의 깊은 혜안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그릇으로 스스로 인정받을 것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일을 해 나갈 만한 ‘도량’이라고 했다.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어 사람이나 사물을 잘 포용하는 품성을 도량이라고 한다. 넓은 그릇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생각이 깊은 것은 허투루 본다는 것이 아니라 심미안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품성이라는 말은 인격과 예의를 갖춘 하나의 格이라는 말이다.
나는 과연 어떤 종류의 그릇인지? 내가 되고 싶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용도를 만들 것인지? 시라는 그릇에 담을 것을 먼저 생각하는지, 시인이라는 그릇을 먼저 생각하는지에 따라 그릇의 규모와 용도와 빛깔은 다를 것이다.
종종 시를 쓰는 분들에게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나요?라는 질문이다. 그전에 반문하고 싶다. 시는 어떤 그릇에 담아야 하는지? 시라는 그릇을 만들기 위한 흙의 선택과 물레를 돌리는 기술, 혼, 고온 이런 것들은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한 정작 ‘시인 자신’이라는 그릇을 먼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필자는 ‘시인 자신’이라는 그릇에 방점을 두고 싶다. 시를 쓴다는 것은 제법 의례를 갖춰야 한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막 쓰는 것이 시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간혹 시를 포함한 평론 등등의 글을 읽을 때 짜증 나거나 답답할 때가 있다. 안드로메다 어디에서 온 말인지 글인지 도대체 근원을 알 수 없는 단편적인 지식의 나열과 언어 채집이라는 명목 하에 새롭게 참신한 말로 기술된 작품들은 영혼이 없는 대답처럼 들린다. 시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며 시인이 본 다른 종류의 세상이 있어야 하며 시인이 던진 메시지를 쉽게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소위 ‘문장주의’를 표방하는 작품들 속에서는 공감의 영역이 많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삿된 지식의 나열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생각의 꼬리물기로 만든 문장은 웅숭깊어 좋다. 같은 사물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각도 참신하고 좋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짜깁기한 글은 짜증만 난다.
예의는 중요한 것이다. 시에 대한 예의는 더 중요하다. 그들만의 리그에 빠져서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독자라는 관점을 무시하면 예의가 아니다. 필자는 보편타당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말속엔 예의와 배려가 깃들어 있다. 물론 모두가 보편타당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문학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절반 정도의 보편타당을 염두에 두고 공부하는 것이 시에 대한 제대로 된 그릇 (시인이라는 그릇) 만들기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위 언급한 필자의 논점에 부합한 세 작품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첫 번째 소개할 작품은 박미라의 [장작]이다. 장작은 통나무를 길게 잘라서 쪼갠 땔나무를 말한다. 장작이 의미하는 것은 가장 먼저 사람이다. 나이가 들거나 혹은 어떤 이유로 소용 가치가 다 해 불쏘시개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나 현실을 사람과 장작이라는 비유로 빚은 작품이다. 전체적인 박미라의 작품 세계는 자연스러운 비유와 언어적 질감이 사색적이라는 것이 돋보인다. 언어적 질감이라는 말은 문장 속에 문장을 삽입하는 방식보다는 문장을 문장 자체로 부피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시는 한 편의 그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박미라의 작품을 읽는다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억지스러운 인용이나 문장이라는 과도한 수사에 미혹되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더 몰입한 작품들은 때때로 독자들을 시인이 느낀 그 어떤 시적 감정의 지점에 쉽게 편승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나의 동일 현상을 보고 나름의 눈으로 발견한 삶이라는 관점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한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박미라의 시는 태생적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장작
박미라
굴절을 잊는 눈빛이 유리창 속 왼쪽 팔다리를 살핀다
어림없는 줄 알지만 그저 바라본다
오후는 늘 소낙비처럼 달려오고
불안은 서둘러 저승꽃을 헤아린다
꽃들도 우거지면 그늘이 깊어서 그는 자주 캄캄해진다
아직은 고분고분한 오른손을 시켜 왼손을 반듯하게 눕힌다
봉숭아 꽃물을 눈썹달만큼 가둬둔 왼손이
선잠 깬 아이처럼 칭얼대지만 모른 체한다
아픈 것들을 곁눈질로 살피던 습관 때문이다
그는 문득 창문을 열고 싶어 진다
달빛과 바람이 뒤엉키는 이런 밤은 깨어있기에 적당해서
불쏘시개에 마땅할 만큼 잘 마른 팔 다리를
달빛에 흠뻑 적신다
너무 마른 것들은 스스로 부서지거나 손을 타기 쉬워서
덜 마른 장작처럼 서서히 타오르려는 것이다
연기 자욱하고 싶은 것이다
덥석! 집어가기 쉽도록 왼쪽과 오른쪽을 가지런히 한다
아무리 타일러도 잠을 깨지 않는 왼팔 곧은 뼈를 창가에 널어둔 건 밤 이슥해서였다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집중 치료실로 그를 인도했다 그들은, 금방 불을 붙여도 될 만큼 잘 쪼개진 마른 장작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댈 뿐이다
그렇다고 달빛이 나서기야 하겠나?
장작이 되어버린 혹은 장작이 되어야 할 것에 대한 시적 모티프로 장작을 갖고 온 것, 장작을 보게 된 시인의 시선을 생각해 본다. 본래 장작으로 태어난 나무는 없다. 한때 푸른 잎을 온몸에 달고 세상을 오시 하던 몸피가 세월이 지나 생산적 기능이 다 하게 되고 자연계의 섭리에 대한 약속을 더는 지키지 못하고 다만, 짧은 시간의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나무. 우리는 그 나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장작이 되어버린 나무의 이야기는 한때 무성한 나무의 이야기가 아닌, 나무가 되어버린에 초점을 두고 솔깃해야 한다. 시인이 두고 가는 이야기가 왕년의 무엇이 아닌, 지금의 무엇이라는 것을 기준을 두고 있다.
너무 마른 것들은 스스로 부서지거나 손을 타기 쉬워서
덜 마른 장작처럼 서서히 타오르려는 것이다
연기 자욱하고 싶은 것이다
덥석! 집어가기 쉽도록 왼쪽과 오른쪽을 가지런히 한다
위 지점에서 박미라가 갖게 된 심상의 내면을 생각해 본다. 너무 마른 것이라는 자조에서 스스로 부서지거나 손을 타기 쉬워서라는 자책에서 덜 마른 장작처럼 서서히 타오르려는 것에서 시인이 가진 방어적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의지를 읽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 자욱하고 싶은 것이다는 지점에서 시인이 장작을 보는 아련한 시선의 배후를 읽고 공유하게 만든다. /덥석 집어가기 쉽도록/ 누군가에게 장작으로 사용될 것을 알면서도 하나의 불쏘시개로 선택될 것을 알면서도 시인의 논리는 덜 마른 장작/너무 마른 것들은/의 긍정에서 덥석! 집어가기 쉽도록 이라는 반어법을 쓰면서 장작이 되고 싶지 않은 심상의 전개를 문장으로 보여준다.
불쏘시개에 마땅할 만큼 잘 마른 팔 다리를/
꽃들도 우거지면 그늘이 깊어서 그는 자주 캄캄해진다/
가둬둔 왼손이
선잠 깬 아이처럼 칭얼대지만 모른 체한다/
그들은, 금방 불을 붙여도 될 만큼 잘 쪼개진 마른 장작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댈 뿐이다/
위 인용한 부분들의 화자의 심상전이를 잘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마른 팔 다리와 잘 쪼개진 장작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대는 것의 심적 변이에 대한 관념을 파악하는 것이 시를 즐겁게 읽게 만든다. 즐거워할 내용이 아닌데, 시를 시로만 본다면 충분히 구독의 즐거움이 담보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한 경우의 상황을 필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시의 본문에서 추정되는 아릿한 슬픔의 단계가 높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수위가 높은 감정의 변이를 매우 쉬운 이미지와 단어를 선택하여 촘촘하게 엮었다. 공간은 평면적이지만 시간은 입체적이다. 장작에서 시작해서 삶으로 맺는 작품이다.
달빛에 흠뻑 적신다/
그렇다고 달빛이 나서기야 하겠나?/
완전히 동일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달빛에서 달빛에 대한 박미라의 같은 지점 동일선상의 진중한 사유와 언어적 해학을 느낄 수 있다. 달, 달빛에 대한 묘한 추상적 관념이 돋보인다. 어쩌면 시는 이러한 깊은 공부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 스스로 자조하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댈 뿐이다/집중 치료실
이 문장이 오래 머리에 남는다. 갸웃댈 뿐이다. 나는 네가 아닌 그들에게는 다만, 장작이라는...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김석의 [버려지는 것들]이다. 냉장고 속 검은 비닐봉지, 그 속에 들어있는 정체 모를 것들, 정체를 모르고 살아왔기에 유효기간이 지나고 급기야 버려지게 된다는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 시의 모티프를 발견했다. 중요한 것은 소소한 일상에서 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종종 시를 쓰다 보면 거창하거나 위대하거나 문학상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몰입해 정작 쓰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작품을 대할 경우가 많다. 필자는 한 달에 약 200~400편가량의 시를 읽는다. 그중 절반 이상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작품들이다. 우선 동기와 소재부터 거대하다. 측량의 깊이는 우주 망원경 수준이다. 해석의 공식은 물리학의 범주를 훌쩍 지나갔다. 공자와 맹자는 아무것도 아닌 구시대 사람일 뿐이다. 제법 다양하고 분주한 언어 채집 능력이 대단하다. 간혹 해석을 요구하는 메일을 보내면 답도 없다. 필자가 틀린 것이 분명하다.
김석의 작품은 아무런 힘도 안 들어있다. 별다른 언어 채집 활동도 안 한 듯하다. 소재 역시 별반 다를 것 없는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냉장고와 비닐봉지다. 하지만 시의 전반에서, 본문의 어디서든 시적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과문한 필자가 늘 주장하는 시 쉽게 쓰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버려지는 것들
김석
냉장고 문이 열리고
눈처럼 흰 성에 사이로
검은 비닐봉지가 눈에 띈다
과거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누가, 언제 넣었는지도 모른 채 냉동상태
들어갈 때 열리고 처음 열리는
검은 봉지의 속처럼 차갑다
검은 얼음덩어리로 엉겨 붙어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그 속은
하얀지 검은지 알 수도 없는
개고기인지, 소고기인지, 먹다만 족발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버려졌다
모르는 것들
유효기간이 지나도
눈에 띄지 않으면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뉴스 속 송곳의 끝처럼 뾰족한 말도
새롭지도 새로울 것도 없는
새까만 거짓말이라며
모른다, 라는 까만 비닐봉지 속에 냉동된 채
모른다는 이유로 지워졌다. 하얗게
눈으로 글자를 따라서 가다 보면 마지막 즈음에 알 수 없는 비장함이 감돌게 한다. 삶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왜? 본문의 어떤 부분이? 하다 시인의 그릇이 그렇겠구나 하는 동의를 하게 된다. 필자의 평론집 제2강의 소제목은 [시는 물이다]라는 제목이다. 기회가 된다면 [시는 일상이다]는 소제목으로 평론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김석의 작품은 작품을 읽으며 나도 한 번 시를 써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유도하는 매력이 있다. 물론 시, 아무것도 아니네로 시작해서 시, 정말 어렵다로 전이하겠지만.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가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단순한 듯해 보이는 주제가 실은 삶에서 가장 고단하고 무거운 주제라는 것을, 그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터치하듯, 마치 크로키를 그린 것처럼 가볍다는 듯이 던지는 것을 시쳇말로 내공이라고 한다. 장좌불와를 마치고 10년 만에 토굴에서 나온 스님이 중생에게 던지는 화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듯한 말이다. 저런 말쯤이야 하며 가볍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살다 보면 삶의 어느 지점에서 그 화두가 삶의 정답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말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겨울 다음에 봄이 온다는 것은 섭리 속 자연의 현상이라 늘 그렇고 그런 봄이지만 매년 오는 봄이 정말 그렇게 쉽게 우리에게 왔을까? 들여다보지 못한 봄의 내면에는 다이내믹한 고통이 내재한 것은 아닐까?
모른다는 이유로 버려졌다/
시의 주제는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쉽다. 하지만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어렵다. 얼핏 쉬운 말이다. 모른다는 이유로 버려졌다. 버렸다가 아닌 버려졌다는 말은 내 의지와 다름을 이야기한다. 버려지고 싶지 않은데 버려졌다는 말은 버려져야 할 이유를 전면에 내 세운다. 모른다는 이유. 살면서 모른다는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버려지는 것은 얼마나 많을까? 비닐봉지 속의 내용물은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단순하게 버려져야 하는 것이 되고 마는, 용도폐기, 종료된 유효기간, 한계 효용의 법칙, 이 모든 단어의 귀결점은 [버려졌다]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내 기준이 아닌 타인의 기준에 의한 종료, 삭제, 버려짐, 내 의지가 아닌 다만, 타인의 잣대로 인한 버려짐. 마치 첫 번째 소개한 박미라의 [장작]과 그 궤를 같이하면서도 다른 각도의 기울기를 갖고 있다.
검은 얼음덩어리로 엉겨 붙어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그 속은
하얀지 검은지 알 수도 없는
개고기인지, 소고기인지, 먹다만 족발인지
개고기, 소고기, 먹다만 족발을 선택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 (개고기에 대한 것은 판단이 다를 수 있어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현상에 대한 단어로만 생각한다.)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있을 수 있는 생각이라는 말이다. 억지가 아닌 소소한 일상을 바탕으로 엮은 작품을 필자는 좋은 시라고 규정한 바 있다. 김석의 작품은 사유의 확장 및 변이조차 결구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뉴스 속 송곳의 끝처럼 뾰족한 말도
새롭지도 새로울 것도 없는
새까만 거짓말이라며
모른다, 라는 까만 비닐봉지 속에 냉동된 채
모른다는 이유로 지워졌다. 하얗게
별 말 아닌 듯하면서도 할 말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닌 척하면서 제시하는 연관 단어들이 무한 반복된다. 김석의 시는 정답이 없다. 무작위 한 판단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독자 기준에서 독자의 살아온 방식에 의해 자신의 작품을 재단하라고 은근히 권유한다. 필자의 관점에서 시는 이렇듯 은근한 권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시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다. 절대로 답을 주지 말자. 답을 찾게 만드는 것이 좋은 시다. 봄이 봄인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그 봄의 빛깔은 누구에게나 같은 질감이 아닐 것이다. 섣부른 정답보다 스스로 자신의 정답을 찾아 나가는 재미를 줄 때 시는 또 하나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김석의 작품이 그렇다는 말이다.
모르는 것들
유효기간이 지나도
눈에 띄지 않으면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5 연이다. 우리가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유효기간이라는 잣대에서, 기억에서 지워질 준비를 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모르는 것들이 되고 싶지 않은 우리들에게서, 모르는 것들로 치부해야 할 모든 것들에게서 다시 한번 되돌아볼 시간을 부여해야 한다. 유효기간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누가 자신할 수 있는가?
마지막 소개할 작품은 박복영의 [아무도 없는 바깥]이다. 필자는 본문을 읽으며 한자로 병기한 한 단어에 초점을 두었다. 문형 門刑/ 문의 형벌이라는 말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문은 안과 밖의 경계다. 문은 이쪽과 저쪽을 분명하게 구분 짓는 잣대다. 문은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나와 너를, 나와 나를, 나와 우리를, 확인하거나 구별하거나, 문 안쪽에 웅크리고 있게 하거나 바깥을 궁금해하게 만드는 일종의 벽이다. 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문은 자신만의 분면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분면이 만들어지게 되는 묘한 속성을 갖고 있다. 문은 형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없다. 문은 문을 만들어 놓은 사람, 문은 문의 소유권을 가진 사람에게 선택된 형벌을 받을 뿐이다. 문의 형벌은 내가 만든 것이다. 형벌은 내가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이기 때문이다. 문이라는 경계를 만든, 문이라는 나만의 명확한 분면을 가진 나는 문이다.라는 관점에서 작품을 읽으면 독특한 박복영만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은 바깥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안이었다. 아무도 없는 바깥의 분면에서 안쪽을 보면 동일하게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박복영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없는 바깥
박복영
허물어지는 벽을 짚고 낡은 문짝이 가쁜 숨을 쉬고 있다
녹슨 경첩에 한쪽 어깨를 걸고
번개 맞은 대추나무처럼 기울고 있다
삐걱이는 문을 열면 누군가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습니까? 말할 것만 같은데
두리번거리는 햇살에선
한 동안 그늘로 앓아온 묵언이 대답으로 쏟아지겠다
마당엔 목젖처럼 튀어 오른 돌멩이가
깊어지는 계절의 바닥을 물고 있으니
버틴 날들이 그려내는 빈집의 찢어진 흉터뿐이다
저 낡아 삐뚤어진 오랜 문형 門刑
누군가 다시 부를 때까지 온몸은 야위어 갈 테지만
어쩌자고 문짝은 가슴을 열고 바깥을 내보이는지
내가 그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문과 나는 동일 소재이며 주제가 된다. 문 안쪽의 나는 문 바깥의 아무도 없는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최인훈 소설가의 ‘광장’이 뜬금없이 생각난다. 남쪽도 북쪽도 갈 수 없는 주인공은 회색이 된다. 광장을 배회하는 회색 비둘기들. 박복영의 작품은 철학이 있다. 문장으로 드러나는 철학이 아닌 시인의 그릇으로 드러나는 철학은 온통 잿빛이다. 얼굴의 반쯤을 가린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을 보는 듯한 모호함을 그 배경에 두고 있다. 박복영의 작품을 맨 앞에 두고 소개하고 싶었다. 문장의 깊이와 배후가 필자의 신념과 배짱이 맞는 것 같다면 변명이 될 듯하다. 문형 門刑/ 이 한 단어의 파급력은 대단하다. 마치 어떤 경계의 속성에 대한 대변인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박복영은 ‘누구 없소?’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아무도 없는 바깥과 누구나 존재하는 바깥이라는 개념의 일맥상통은 길게 언급하지 않아도 독자는 이해할 것이다. 박복영이 기대하는 ‘누구’를 살펴보자.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습니까?/
한 동안 그늘로 앓아온 묵언이 대답으로 쏟아지겠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어쩌면 박복영이 찾고 싶은 ‘누구’는 박복영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문형을 받고 있는 문 밖의 자신. 내가 그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라는 혜안의 성찰이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다.
저 낡아 삐뚤어진 오랜 문형 門刑
누군가 다시 부를 때까지 온몸은 야위어 갈 테지만
어쩌자고 문짝은 가슴을 열고 바깥을 내보이는지
문/ 문형/ 문짝 = 어쩌자고 (바깥 + 안 + 스스로 만든 경계)라는 공식을 만들어 시를 읽으면 박복영이 만든 자신의 그릇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면 7월이다. 한 해의 절반이 어어 하는 틈에 가버렸다. 특히 코로나 19 정국으로 인해 세상이 혼란스럽다. 다행히 세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이다. 지면을 빌어 관계된 모든 수고 하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바라마지 않는 것은 다음 호 발간 즈음, 모두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다.
시는 힐링이다. 시는 자가 치유다. 시는 꾸밈음이나 장식음이 없는, 가능한 재료 본래의 맛을 낼 줄 아는 그릇에 담아야 제맛이 난다. 더불어 그 그릇에 담긴 제법 청명한 소릴 듣고 싶다. 독자 여러분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드린다. [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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魔皇이강철님의 댓글
魔皇이강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