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혹은 크레바스 / 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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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50회 작성일 20-08-03 05:47본문
늪, 혹은 크레바스 / 김인자
한 달 전에 보낸 소식을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늪, 혹은 크레바스
이런 생각은 일상의 틈으로 들어와
부피를 늘리더니 마침내
덩치를 키워 줄기와 뿌리를 내렸다
내 영혼의 크레바스는 얼마나 깊을까
어두울까 차갑고 외로울까
나는 하늘로 닿을 사다리를 마련하고
네 심연을 향해 청동화로를 등에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간다
어둠이 짙을수록
손가락 발가락은 둔중해진다
암흑의 핵심을 떠올릴 즈음
나의 등허리엔 타투보다 깊고 선명한 화인
네가, 못 박힌다
단단히 얼어붙은 네 겨울의 피와 근육이
내 마음의 청동화로로 녹일 수 있기를,
지상에는 붉은 갈색을 지나
모든 것이 하얗게 잘 익은
서설이 내리는 완벽한 날
한 줄기 햇살이 내 심장을 비추는 환영을 본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끄는 힘
내겐 여전히 네가 우선이다
지면서도, 아니 질 수 있어서
충분히 행복했던 나는
청동화로의 불씨가 꺼지기 전
너를 안고 천천히 하늘로 나른다
* 김인자 : 1955년 강원 삼척 출생, 1989년<현대시학> 등단
시집 <겨울 판화> 등 다수
< 소 감 >
늪처럼 절망적이고 크레바스처럼 차가운 네 마음을 향해 더듬더듬
힘껏 돌진한다
어느 시인의 시에 "너와 나는 서로가 외로운 섬이다" 란 구절이 있다
눈보라를 이기고 파도를 헤치고 노저어 가야하는 좀처럼 닿기 힘든 섬
너를 향한 나의 의지와 신념과 집념은 가슴 벅차도록 눈물겨워서
크레바스처럼 차갑고 어두운 네 심연 녹이기 위해 청동화로 걸머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다리를 내려간다
한 인간을 향한 한 인간의 집념이 타는 불꽃처럼 강한 비유로 형상 되면서
번개 같이 번쩍이는 이미지가 문신처럼 화인처럼 독자의 마음 속에 못 박힌다
*
파닥이며 일렁이며 빙- 빙- 호숫가를
돌고 있는 백조여,
열 아홉 살 옛 누이를 꼭 닮았구나
어렴풋이 뒤안길 돌아서는 뒷모습은
긴 세월 저미어오던 아픔 이었고
오롯이 떠오르는 해맑은 웃음은
잊고 싶은 먼 옛날의 그리움 이었다
그리움도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워서
누이가 두드리던 아득한 피아노 소리는
흰빛 너울로 자꾸 번져오는데
황홀경에 빠진 나비는 더 견디지 못하고
하얗게 무너져 내린다
나뭇가지에 서린 눈망울마다 얼비친 그림자는
소록소록 꿈길마다 찾아오던 하얀 발걸음은
너였구나,
- 졸작, 눈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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