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글과 글자 - 별표 전파사/ 박진형외 2 > 내가 읽은 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내가 읽은 시

  • HOME
  • 문학가 산책
  • 내가 읽은 시

    (운영자 : 네오)

 

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평론] 글과 글자 - 별표 전파사/ 박진형외 2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463회 작성일 20-10-07 08:14

본문


● 글과 글자 

- 김부회 시인, 평론가 


* 별표 전파사/ 박진형 
* 후추/ 구수영 
* 겨울 설악/ 김영수 


  비가 오랫동안 내렸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기상 관측 이후 최고의 강우일 수를 기록했다는 말도 들린다. 여름의 비는 순환하는 계절의 섭리처럼 당연한 것이지만 적당한 양의 비가 내려야 가을철 수확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는데 내려도 너무 내렸다. 년 초에 시작된 코로나로 인해 지쳐가는 즈음, 찾아온 태풍으로 인해 경향 각지에 많은 피해가 있었다. 등교하지 못하는 아이들, 사회적 거리 두기 시행으로 인한 자영업자들의 매출 피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한 관계의 훼손, 세계 경제의 암울한 후퇴 등등 이루 열거하기에도 벅찬 변수들이 많은 한 해였다. 6월의 평균 기온이 7월보다 높은 이상기후도 출몰하고 미국 콜로라도에선 전날 30도에 육박하던 기온이 다음 날 눈이 내렸다는 뉴스를 보냈다. 갈수록 산다는 것이, 살아낸다는 것으로 바뀌는 요즘이다. 산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은 묘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자연스러움과 비 자연스러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눈으로 보면 작은 글자의 차이가 삶의 궁극적인 양태를 쉽게 바꾸기도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살아간다는 말은 더불어 살아간다는 말이다. 나와 네가 현재의 시공간을 섭리 속에서 순응하며 때론 즐거워하며 산다는 말이다. 살아낸다는 말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희망과 바람과 관계없이 그저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종속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무언가에 이끌려 살아낸다는 말은 미래를 부정하게 만든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연속성이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살아낸다는 말은 힘든 말이다. 무거운 말이다. 요즘이 그렇다.  

  지난달에 작은 사고가 있어 기고를 한 달 빼 먹었다. 먼저 독자 여러분에게 깊은 사과를 드린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기고 없이 보냈다. 긍정의 관점에서 보면 빼먹은 한 달은 휴식과 같은 달콤함이 있었지만, 부정의 관점에서 보면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허탈한 한 달이었다. 마치 살아낸다는 말과 같은 심정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면 다음 글을 쓰게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의 아픔이 새살처럼 돋는다는 것을 배웠다. 어쩌면 시를 쓴다는 것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글과 멀어져 있으면 다시 붓을 들면 그 이전과 다른 좋은 질감의 시를 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공백의 기간 제곱만큼, 아니 그 이상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이전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산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의 차이가 그렇다. 살아내는 것이 길어지면 산다는 것으로 전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의식의 전환 자체가 영영 힘들어질 수도 있다. 글을 삶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하게 맞을 것이다. 글은 살아내기가 아닌, 사는 일 그 자체다. 평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장황하게 한 달을 빼먹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당혹스러울지 모르나 필자의 견해에서 볼 때 글에 대한 평론보다 중요한 것은 글에 대한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본질이라는 말은 사물이 사물 그 자체이게 하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글의 본질이라면 글이 글 그 자체가 되도록 하는 글의 고유한 성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글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살아내는 이야기가 아닌, 사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살아낸다는 것 역시 글의 본질 중의 하나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글이 살아낸다는 것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글은 아픈 글이 되며 미래지향적 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의 본질이 성찰 혹은 자기반성이라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진술이나 기술이 더 자신에게 근접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글들이 살아낸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발표되고 있다. 작금의 상황이나 삶의 형태가 힘들고 지치는 상황임을 고려해도 오랫동안 글감의 소재는 살아낸다는 것을 더 임팩트 있게 다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승화 또는 미화라는 포장기술을 통해 의식의 저변에 있는 아릿한 것들을 펼쳐 놓아야만 미화하기에 좋은 소재가 되는지 모르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그런 종류의 글이 더 많다는 것은 솔직하게 말하면 불편하다. 불편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먼저 꼽으라면 포장이다. 현재의 나를, 아픈 나를 더 아프게 하거나 덜 아프게 꾸며내야 한다는 것이다. 발표되는 글들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몇 가지 요인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보다는 가을에, 오전보다는 오후에, 좋을 때보다는 좋지 않을 때 발표되거나 쓴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필자는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이라는 사이트에서 창작시 방을 운영하는 직분을 갖고 있다. 또한 몇몇 시 전문 밴드에서 매달 시 작품을 선정하거나 평론하는 직분도 갖고 있다. 매일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계절적 요인과 시간적 요인, 날씨 적 요인들을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쉬운 예를 들어 비가 내리는 날은 그렇지 않은 날에 비해 제법 많은 글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마치 비 내리는 날에 부침개나 찌개가 생각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의식 속 저 밑에 자리 잡은 무의식 속에 공식처럼 들어 있는 비에 대한 감상의 폭이 그렇게 인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론 우리 무의식은 산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에 대한 의식의 표출에 대한 자연스러운 답을 가진 듯하다. 산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에 대한 글의 본질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한 선택의 몫은 시인 자신에게 있기도 하며 동시에 독자의 선택에 대한 몫이기도 하다. 필자의 견해는 산다는 것에 대한 의식의 흐름을 시 편에 담는 것이 더 올바른 것으로 생각한다. 코로나로 인해 외출을 못하거나 대면접촉이 어려워져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대 유행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언제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있었는지 어쩌면 지금 이 시간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을 것이라는 반전의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과연 우리는 지금, 사는 것인지 살아내고 있는 것인지? 우리의 글은 사는 것인지 살아내고 있는 것인지? 되돌아볼 일이다.  

  이번 달의 글제를 글과 글자로 정했다. 글과 글자는 분명 다른 말이다. 글자를 구성하여 글을 만드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 시 작품이 글자로만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발생한다. 글자는 법칙에 의한 표현이다. 글은 법칙에 의한 표현에 생각이 덧입힌 것이다. 쉬운 예로 상상력을 총동원한다는 것을 빌미로 전혀 개인적인 주관에 의한 상상력이 도를 넘어 생뚱한 방향의 상상으로 이어지거나 누구도 해독하기 힘든 글자의 성찬으로 끝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글이 아닌 글자에 머물러 있는 작품들은 이야기가 없다. 그 흔한 성찰이나 반성의 한 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필자의 부족한 공부 탓이라는 사족을 달아두어야 한다.)시를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은 눈이 어지럽다는 것이며, 아. 정말 공부가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짜릿한 한 방에 의한 감동이나 내밀한 시적 질감에 의한 교감이나 교통이 없이 다만, 글자의 방향성에 의한 신호만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현대시인가? 그렇다면 나는 시를 더는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곤 한다. 마치 중학생이 고차 방정식을 대하면 중간과정을 생략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괴리감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맞을 듯하다. 음악이 음학이 되고 말이 언어가 되고 진술이 언술이 되는 경우와 같은 당혹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은 것이다. 음악이 음학이 되는 것은 논리의 재단이다. 감성을 이성화하는 것이며 글의 영혼을 하나의 틀 속에 가두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자유스럽지 않은 글은 도식화 단계로 이어지고 그 도식이라는 틀 속에서 재주만 무성하게 피울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산다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을 배경에 품고 있다. 살아낸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맞춰간다는 것이다. 글자는 살아낸다는 말과 같다. 글을 산다는 말과 같다. 아주 간단한 답이다. 작품이 글자로만 채워진다는 것은 불편하다. 아무리 짧은 작품이라도 글이 된다면 ( 더 정확하게 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 혹은 감성이 녹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필자의 견해를 보충하기 위해, 혹은 필자의 견해에 대한 지원사격을 위해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히며 보편타당하며 현대시를 쓰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어느 문예지 신인상 심사평 하나를 소개해 본다.  


축제이면서 모험이기도 한 설렘 / 김병호(시인, 『시인수첩』 주간) 


   〈시인수첩신인상〉은 계간 《시인수첩》의 역할 중 가장 설레고 귀한 역할로 여겨진다. 한 명의 시인을 《시인수첩》의 이름으로 우리 시단에 내놓는 일은, 우리 시문학사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 시에 새로운 에너지와 가능성을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축제이며 모험이기도 한 신인상 심사가, 심사자로서 응모자 못지않게 설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년까지 매년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던 응모자 수가 올해는 다소 주춤하였다.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고 있는 코로나19 영향을 문학판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예심의 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 오히려 치열하였다. 응모작의 허수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응모작 전체를 더욱 촘촘하게 읽을 수 있었다. 시적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습작 수준의 작품이나, 자기 감정에 도취하여 이를 독자에게 강요하는 작품, 산문시를 핑계로 시의 내재적 조건들을 무시한 작품, 낯익고 고루한 비유와 상징으로 외화에만 힘쓴 작품, 시단의 유행을 지나치게 좇아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자기 토대 없이 허술하게 구축한 작품, 삶과 언어에 대한 근본적 경외가 없는 작품들을 우선으로 예심에서 지워 나갔다. 

   작품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언어의 긴장과 패기를 조절하면서 언어적 개성을 추구하는 작품과 일상의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실질적 감동을 주고자 하는 작품이었다. 

   예심은 이 중에서도 시인의 개성적 시선과 감각, 사유를 통해 시적 대상을 형상화하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거나 자기 문장의 힘으로 효율적으로 언어를 운용하면서 상상력의 내면화나 그 깊이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한 작품들을 눈여겨보았다. 그 결과 본심에 올려 집중적으로 살펴볼 작품들을 아래와 같이 추리게 되었다, 

『2020 시인수첩 신인상 심사평/ 김병호 (시인수첩 주간)』전문 인용 

필자가 위 심사평을 인용하는 것은 개별 작품에 대한 심사평이 아닌, 응모한 사람들의 분포와 이유, 응모한 사람들 글의 편향성, 보편성, 다중성에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감정에 도취하여 이를 독자에게 강요하는 작품이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자기감정은 말 그대로 자기감정이다. 보편타당한 감정이 동질성이나 공감성은 무시한 채, 자신의 것에 천착한 작품은 살아내기에 급급한 글자라고 하면 맞을 듯하다. 시 작품 하나가 시라는 틀 속에서 그저 살아내기에 급급하다면 완성도는 차치하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 감정선의 어디에 초점을 맞춰줘야 할지 독자로서 난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아닌데, 아닌데- 하는 말을 연발하며 시를 읽어줘야 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또한 산문시를 핑계로 시의 내재적(필자는 시의 본질적이라고 바꿔 말하고 싶다.) 조건들을 무시한 작품 역시 시라는 틀 속에서 살아내기에 급급한 것이다. 위 심사평 중 가장 도드라지는 말은 [자기]라는 말이다. 자기감정, 자기 토대 등등이 없는 글자에 치우친 작품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시와 독자의 거릴 멀어지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너는 외롭지만 나는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풍경의 배경을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 심사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삶과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경외가 없는 작품이라는 말이다. 경외는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공경은 나중 문제라고 치부해도 두려워한다는 말이라는 것이 두렵다. 생각나는 대로, 보이는 대로 마구잡이식 글자의 남발은 낭비다. 적어도 글을 쓰는 시인이라면 독자를 두려워하기 이전에 글을 두려워해야 한다.  

자신의 글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간다는 말이다. 살아내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간혹 타고난 시적 감수성이 탁월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분들의 작품 속엔 아무리 쉬운 말로 시를 써도 내재된 감각과 시의 본질에 대한 충만한 질감이 있다. 감동과 소통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몸으로 이해한 사람의 작품은 체화된 말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법이다. 손쉬운 잔기술로 그것을 흉내 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간접 경험이 아닌 직접 경험이라는 기본 토대를 바탕으로 시를 쓴 작품 속에서 아련하게 맡아지는 향기는 삶이라는 고유의 향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시의 바탕은 서정시다. 서정시의 기본은 서정이다. 모두 아는 말이면서도 서정을 서정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현대시는 사상누각과 같은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며 가장 중요한 시와 독자라는 상관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모던포엠 10월호에서는 위 언급한 필자의 논리에 근접한 작품 세 편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매번 같은 말이지만 필자의 논리에 부합하거나 근접이라는 말은 논리적이라는 것보다 감성적 부분에 대한 해석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가장 먼저 소개할 작품은 박진형 시인의 [별표 전파사]다. 전파사라는 말의 어감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지금은 없는 직종, 직군, 직업이라는 말이다. 1980년대는 거리에 전파사가 많았다. 라디오를 수리하거나 판매하거나, 전자제품을 수리 판매하는 곳을 말한다. 전파사는 동네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했다. 동네 친구들이 모여 한담을 주고받거나 어르신들이 장기, 바둑을 두기도 하고, 지금은 없지만 테이프에 담긴 노래를 복사하거나, 신곡이 수록된 테이프를 사거나 하는 것 역시 전파사의 역할이었다. 가끔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나 가요를 우연히 듣게 되면 전파사 앞을 부질없이 서성거리게 만드는 것도 전파사의 역할이었으며 성탄절 몇 주 동안 캐럴을 듣는 것 역시 전파사를 통해야 하는 일이었다. 박진형의 별표 전파사를 소개하기 전 장황하게 전파사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전파사를 매개체로 한 그 모든 젊은 시절의 감수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단순하게 전파사라는 직종의 몰락이 아닌, 그 시절의 향수와 감수성, 그 모든 것들이 사회적 변화라는 허울 속에서 이젠 우리 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박진형의 별표 전파사는 전파사가 아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대한 그리움을 시적 질감으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파사는 전파사가 아닌, 개인의 전파라는 것으로 치환하여 이미지화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입移入이라고 표현하면 옳을 것 같다. 화자가 갖고 있는 어느 날의 감정 혹은 기억을 입체화하여 글자로 만들어 낸 것을 다시 독자에게 전파처럼 보내고 있다는 심정으로 시를 감상하면 가슴 밑바닥의 어느 곳에 두고 온 무언가가 차오를 것이다. 

별표 전파사 

박진형 

그의 전파사에는 수선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다 
세 개의 별과 금빛 별이 반짝이던 시절부터 
별을 수리하던 그는 오늘도 별의 안부를 묻는다 

떨어진 별들이 다시 운행하기를 기다릴 때 
이들은 한 음계씩 타고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사내의 회로계를 거치면 비밀은 드러나 
전파사는 별들의 무덤에서 별들의 자궁으로 변했다 
그의 드라이버만 있으면 별들은 
우주 어디든 다시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은하수 건너 새로운 별로 이주할 꿈을 꾸었다 
별똥별이나 혜성은 그의 전파사를 기웃거렸다 
마모된 공구함과 칸칸이 채워진 낡은 부속품들은 오랜 친구 
하늘에서 노래하는 별들 속에 그의 체온이 남아있다 

점점 사라지는 별들과 새롭게 태어나는 별들 사이에서 
그의 전파사는 종종 기우뚱거린다 

어떤 별도 들르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수리된 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키운 아들은 
별을 노래하다 어느 날 별이 되었다 


시의 전반은 근친의 비교와 소재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거나 인용하거나 차용하여 정리했다. 전파사와 그 안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수리, 수선, 회로계, 드라이버, 공구함, 부속품들이라는 근친의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전파사의 배후에 존재하는 별과 관련된 ( 정확하게는 별을 노래하다 별이 된 무엇)것으로의 전이는 박진형의 시적 내밀함이 촘촘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전파사와 별이 아닌, 전파와 별이라는 상관관계는 전파사를 매개체로 둔 [전파]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가수의 꿈을 키운 아들은 별을 노래하다/는 전파 없이 노래가 아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시를 읽는다면 전파의 역할이라는 것이 시의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그의 전파사에는 수선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다/ 

떨어진 별들이 다시 운행하기를 기다릴 때/ 

그의 드라이버만 있으면 별들은/ 
우주 어디든 다시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수리된 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키운 아들은/ 
별을 노래하다 어느 날 별이 되었다/ 

수선되지 않는 시간은 ‘수선되지 않은’과 미세한 차이를 갖고 있다. 단정과 진행이라는 단어의 변화를 주목해서 첫 행을 읽으면 다음 단계의 진행에 대한 충분한 단서가 될 수 있으며 시의 내면을 읽는 키포인트가 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수선되지 않는 시간은 과거로부터의 단절과 미래에 대한 암울한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수선되지 않는 시간 속에는 박진형이 의도한 기술적인 단정이 존재한다. 그 단정의 말미는 결국 수리된 별이라는 융통과 별을 노래하다 별이 되었다는 일반론적인 결론이 함유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안 되는 것에 숨을 붙여놓아도 결국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는... 

종종 평론을 하다 보면 꽤 어렵게 된 평론을 자주 접하게 된다. 문장에 대한 분석이 날카롭다 못해 베일 정도다. 동, 서양 철학에 기반을 둔 철학의 논리적 분석이 기발하다 못해 감탄이 나온다. 문장과 심리, 철학과 논리, 누구의 이론에서 추론된 사고의 영역까지 나오면 두 손 두 발 다 든다. 좋구나, 과연 날카롭네. 어쩌면 여기까지 생각을, 등등의 사고력과 추론력에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문장을 재단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 있겠지만 시인이 시를 쓰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본질에 대한 성찰은 문장 재단에 비하여 매우 작다. 글자를 글자로 분석하는 것은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 반대한다. 글을 글로 보는 것을 권장한다. 시는 시스템이면서 시스템이 아니다. 시는 논리면서도 논리가 아니다. 문제는 본질에 있다. 비평, 토론, 평론 등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점은 인식이다. 화자 인식의 범위와 인식의 시발점, 인식의 확장, 인식의 무게와 가능성에 대한 감상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박진형의 [별표 전파사]는 비평이 아닌, 감상의 범주에서 읽을 때 제 맛이 난다. 감상은 예술 작품 등을 즐기고 이해하면서 평가한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즐기고 와 이해하면 서다. 평가가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즐기고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 시를 읽을 때, 감동의 이입이 성립되는 것이며 시를 시의 본질대로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파사는 별들의 무덤에서 별들의 자궁으로 변했다/ 

점점 사라지는 별들과 새롭게 태어나는 별들 사이에서/ 
그의 전파사는 종종 기우뚱거린다/ 

행간에서 언급하고 있는 삶의 본질을 되새겨보자. 대단한 철학이나 증폭된 논리가 아닌, 눈으로 쫓아가며 얻어지는 내 기억보다 오래된 삶의 변화와 세상에 대한 시선을 점검해 볼 때다. 분명한 것은 수선될 수도 있는 시간이 흐른다는 점이다. 설혹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수선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박진형은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첫 행의 의미가 말 그대로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구수영의 [후추]라는 작품이다. 후추 역시 박진형의 시와 동일하게 어느 지점의 어느 현상에 대한 자전적 영상의 반복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문장의 구성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지거나 항해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읽힌다. 이제는 국제결혼이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가 되었다.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 어떤 나라의 아가씨도 한국의 삶이 어색하지 않게 보인다. 하지만 표면적인 어색하지 않게 보이는 것의 배후에는 여전히 [국제]라는 말이 원천적으로 갖고 있는 부조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후추]의 본문에 아무렇지 않게 언급한 – 아버지뻘의 남편 간병인으로- 라는 말속에서 [국제]라는 말이 가질 수밖에 없는 아릿한 아픔이 상존한다. 예전 결혼 적령기의 청춘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서너 살 차이가 가장 적당한 결혼이라는 말이다.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이해와 용서 그리고 관용이라는 말을 실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말이며 부부 관계에서 가장 최적화된 지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나이가 혼인을 결정하거나 많은 나이 차이가 부적절하다는 말은 아니다. 결혼의 가장 큰 동기부여는 ‘사랑’이기 때문에 나이와 결혼의 상관계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결혼이 무엇을 염두에 둔 정략적 선택의 한 수단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후추


구수영


오후가 왔다, 유부초밥 세 개에 어묵탕을

먹으며 전국노래자랑 마지막 장면을 본다

연분홍 치마저고리 입은 캄보디아에서 이주한

며느리가 부르는 노래


사랑 그 사랑이 저엉말 조아았네,

제법 간드러지게 넘어가는 노랫가락

내 베트남 친구 마리아가 생각났다


결혼식을 치룬지 하루 만에 혈압으로 쓰러진 남편

재활병원 로비에서 처음 만나던 날 머뭇거리며

우리는 연애 결혼했어요. 언니

시집온 다음 날부터 아버지뻘의 남편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스물아홉 살 그녀


남편을 엄청 사랑했구나

사랑요? 너무 힘들어요

둘 사이에 아기가 없어서 한국 국적 받는데

문제가 될 거 같다고 콧등에 주름을 잡던 마리아

아기를 어떻게 낳을 수가 있어요?


맞아 사랑은 힘든 거야 베트남에서 후추 농사를

짓는다는 부모님이 보내준 열매 곱게

빻아 건네던 작은 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활병원 앞

지난가을 뽑지 않는 배추가 무너지고 있다


그래, 아기가 무슨 후추 농사도 아니고... 무슨 수로


주목할 부분을 먼저 소개한다.

시집온 다음 날부터 아버지뻘의 남편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스물아홉 살 그녀/ 


남편을 엄청 사랑했구나/ 
사랑요? 너무 힘들어요/ 

사랑, 그리고 아버지뻘, 시집온 다음 날부터 남편 간병인, 스물아홉 살 그녀가 시사하는 점이 바로 그 지점이다. 이유는 차치하고 결과는 기형적인 결과물에 대한 양쪽의 시선이다. 당사자의 시선과 목격자의 시선, 제삼자의 시선은 절대 당사자의 시선이 될 수 없다. 

맞아 사랑은 힘든 거야 베트남에서 후추 농사를/ 
짓는다는 부모님이 보내준 열매 곱게/ 
빻아 건네던 작은 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활병원 앞/ 

필자는 남편을 엄청 사랑했구나 속의 사랑에 대한 시선을 주목해서 읽었다.  

남편을 엄청 사랑했구나/ 
사랑요? 너무 힘들어요/ 

맞아 사랑은 힘든 거야/  

힘든 거야의 무게는 과연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힘들어요의 느낌의 크기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필자는 이런 부분을 시선 적 모순이면서 합리적 느낌의 공존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같으면서도 다른 말을 둘은 하거나 생각했다. 마치 아기가 무슨 후추 농사도 아니고 라는 결구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무슨 수로 

시제 후추와 본문 중 사랑이라는 단어, 힘들어요 와 힘든 거야의 차이를 천천히 들여야 보면 구수영이 하고 싶은 말의 모두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건에 대한 이해와 포용 이전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과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구의 ‘무슨 수로’는 매우 적절한 마무리이며 탁월한 방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적 아픔을 상기시키기 위해 3연을 한 번 더 소개하며 맺는다. 

결혼식을 치룬지 하루 만에 혈압으로 쓰러진 남편 
재활병원 로비에서 처음 만나던 날 머뭇거리며 
우리는 연애 결혼했어요. 언니 

시집온 다음 날부터 아버지뻘의 남편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스물아홉 살 그녀 

과연 필자가 무슨 수로 스물아홉의 그녀를... 

마지막 소개할 작품은 김영수의 [겨울 설악]이다. 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주지적 시점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生의 관점에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른바 사건의 개요 속에 담지 된 대척점이라고 하면 맞을 듯하다. 산 정상에서 길을 잃고 얼어 죽은 남자 vs 그 산의 정상을 오르고 싶어 정상을 바라보는 남자를 화면 대비하듯, 채도와 명도를 대비하듯, 흑과 백을 촬영하듯, 삶과 죽음을 채록하듯, 경계 너머의 것과 경계 이전의 것을 대비하듯 그 모든 대비가 끝이 나는 불연속 변주곡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김영수의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송곳 같은 낭중지추를 호주머니에 품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는 튀어나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삶이라는 주머니 속의 송곳. 필자는 이 송곳의 의미를 드문 한 성찰이라고 하고 싶다. 설악이라는 산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외경심은 어쩌면 운명이라는 말과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는 듯하다.  

겨울 설악 

김영수 

일주일 전,  
산 정상 근처에서 길을 잃고 
육십 넘은 한 사내가 얼어 죽었다 

내가 정녕 오르고 싶어 
하냥, 
아린 그리움 눈에 담아 
바라보는 저곳에서 

절절한 두려움으로 
이곳을 아득히 내려 보다가 
사내는 끝내 의식의 끝을 놓은 것이다 

나는 그리움으로 저곳을 
사내는 두려움으로 이곳을 
서로 바라보는 경계에서 
나누어진 차안과 피안 

산다는 것은 
아니,  
살아낸다는 것은 
그리움이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이 그리움 될 때 
끝이 나는 불연속 변주곡 

끊어진 명줄 하나 또 끌어안고 
겨울 설악은 말을 잊는다. 


서로 바라보는 경계에서 나누어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세계는 다만, 나누어짐의 단순한 선 긋기가 아닌 엄밀하게 생각하면 죽음과 삶이라는 궁극적 목표점(?)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다. 부연 설명하기 위해 결구를 인용해 본다.  

끊어진 명줄 하나 또 끌어안고/ 
겨울 설악은 말을 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또]라는 말이다. 끊어진 명줄 하나 끌어안고 가 아닌, 또 하나 끌어안고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의 보통 명사에 대한 경계를 구분 짓는 화자의 시선이다. 다만 말을 잊을 수밖에 없는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에 대한 경계에 대한 정의가 일반적이지만 또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아니,  
살아낸다는 것은 
그리움이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이 그리움 될 때 
끝이 나는 불연속 변주곡 

그리움이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이 그리움 될 때라는 말은 쉬운 말이 아니다. 말의 순서를 되짚어 생각하면 김영수가 가진 삶에 대한 정의가 내 것이 되고 동시에 당위성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낸다는 것은 두려움이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다시 두려움이 될 때라고 바꿔보면 말이 가진 고유의 생각 본질을 알게 될 것이다. 행간의 대부분이 그런 성찰을 바탕으로 하나의 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그리움으로 저곳을 
사내는 두려움으로 이곳을 
서로 바라보는 경계에서 

나의 그리움이 두려움으로 바뀐다는 것은 경계 너머의 것과 이전의 것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나의 점으로 보는 일이다. 이곳과 저곳으로 대별되는 생명의 단절과 비 단절의 화두는 결국 말을 잊은 겨울 설악이 된다는 말이다. 어떤 눈으로 상황에 맞는 느낌을 갖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끊어진 명줄은 결국 끊어질 명줄의 다른 말이다. 그렇게 설악은 또 하나 끊어진 명줄을 품에 안는다. 그것은 분명한 삶의 이치이며 섭리인 것이다. 글을 읽는 우리나, 글을 쓴 김영수 시인이나 우리 모두는 그렇게 겨울 설악의 품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혹은 살아내거나. 

10월이다. 여전히 불안한 코로나와 생계와 생존과 우린 살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왔다. 살아내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할 수 만 있다면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 많은 아픔들이 거리에, 도시에, 기생하며 사는 들고양이 신세가 되지 않아야 한다. 시를 읽어야 한다. 찾아서 읽어야 한다. 어쩌면 이름 모를 어떤 시인의 시 한 편에 해답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아니, 해답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독자의 몫이라는 매우 유용한 공식에 대입하면 그렇다. 글자가 아닌 글을 쓰는 시인이 되면 좋겠다. 한 달 건너 만난 독자 여러분에게 따듯한 행복이 분에 넘치도록 채워지면 더 좋겠다. [김부회]

추천1

댓글목록

Total 288건 3 페이지
내가 읽은 시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188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5 0 02-25
18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7 0 02-21
18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1 0 02-11
18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6 0 02-04
18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2 0 01-30
183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2 0 01-28
18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4 1 01-26
18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3 1 01-20
18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7 1 01-18
179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2 0 01-17
178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9 0 06-24
17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3 1 06-11
17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1 0 06-07
17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1 1 06-04
17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30 0 03-19
173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85 0 03-15
17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59 0 03-05
17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36 1 02-26
17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63 1 02-24
169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87 0 02-10
168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37 0 02-04
16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98 1 01-21
16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67 1 01-20
16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35 0 01-15
16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80 1 01-11
163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4 0 01-04
16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1 0 12-28
16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81 1 12-23
16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24 1 12-21
159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63 0 12-11
158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22 1 12-04
15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81 0 11-27
15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69 0 11-23
15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77 2 11-16
15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03 0 11-16
153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59 0 11-06
15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77 0 11-02
15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65 0 10-26
15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34 0 10-19
149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02 0 10-12
열람중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64 1 10-07
14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96 0 10-05
14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20 0 09-28
14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38 0 09-21
14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09 0 09-14
143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76 0 09-07
14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39 0 08-31
14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67 0 08-24
14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18 0 08-17
139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90 0 08-10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