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투구꽃을 생각함/문성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34회 작성일 20-12-19 12:02본문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문성해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 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집 창으로 뛰쳐들어온 섬서구메뚜기 한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서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올라온 나를 그 집 노부부가 있는 대로 저주할 것이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에서, 2012 -
* 시인은 모든 세상사를 온몸으로 떨쳐내고 시에 몰두한다.
시에 몰두함은 단 하나 먼 산의 각시투구꽃을 생각함이다.
보이지 않는 전파로 전화가 오가는 것처럼
시인과 꽃을 연결하는 건 오로지 시다.
그것은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와
맥을 같이 한다.
좋은 시는 좋은 시로 통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