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선생의 틀니/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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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14회 작성일 21-01-14 19:26본문
황순원 선생의 틀니
정호승
황순원 선생님 단고기를 잡수셨다
진달래 꽃잎 같은 틀니를 끼고
단고기 무침이 왜 이리 질기냐고
틀니를 끼면 행복도 처참할 때가 있다고
천천히 술잔을 들며 말씀하셨다
아줌마, 배바지 좀 연한 것으로 주세요
우리들은 선생님의 틀니를 위해
일제히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황선생님만큼은 틀니 낀 인생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틀니를 끼면 인생은 빠르다
틀니를 끼면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틀니를 끼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생의
덜미를 잡히기 시작한다
틀니를 끼는 순간부터 인간은
육체에게 비굴해진다
서울대입구 지하철역
경성단고기집을 나오자 봄비가 내렸다
황선생님을 모시고 우리들은 어둠속에서
밖을 향해 계속 길을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틀니를 끼고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 할 날들이 더욱 두려워
더러는 지하철을 타고 가고
더러는 택시를 타고 가고
더러는 걸어서 가고
평생에 소나기 몇 차례 지나간
스승의 발걸음만 비에 젖었다
-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서, 1997 -
*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이 세 작가의 세 소설을 읽고 우리나라도 이만한 작품이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내 청춘의 불꽃 같았던 작품들을 선사한 이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그런데,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니, 거기다가 함께 음식을 나눈다니,
시인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것이리라.
덤으로 함께 소나기를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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