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정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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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21-01-19 18:49본문
대설주의보
정철훈
물이 끓고,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고, 세상이 끓고
하얀 김이 서려 노인 몇은 뿔테안경을 벗고
눈시울을 닦았다
하늘은 이내 폭설이라도 퍼부을 듯 어둑히 내려앉고
점방 난롯가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뽑다 만 낮은 목청을 주섬주섬 가슴에 주워담았다
그들은 실패한 혁명 따위, 도시에서 돌아온 삶 따위에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듯 귀를 후비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옛 사랑에 대해서도, 파산에 대해서도,
선거에 대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마을 우물을 하나 더 파야겠다거나
막힌 도랑을 치워야겠다거나
올 겨울에 죽을 노인을 거명하며
언 땅을 파야 하는 지난한 장례를 걱정할 뿐이었다
시궁창이나 구정물 같은 세상의 마지막 흐름에 관해
북망산에 묻은 아무개가 지금쯤 충분히 썩었는지에 관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있었다
아무개는 붉은 잇몸을 뒤집으며 실실 웃고
아무개는 누런 이빨을 꽉 문 채 막걸리 사발을 돌렸다
마침내 눈이 내리고
문틈을 울고 가는 바람 앞에서
그들의 발음은 자주 뒤섞여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김을 불어 성에 낀 유리창을 닦는 나를
그들은 눈짓으로 핀잔하였다 그뿐이었다
누가 누구를 앞세웠다느니
누가 누구의 뒤를 따라갔다느니
모든 삶이 죽음에 뒤섞이고 있었다
그들의 심장처럼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고
내리는 눈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나는 아무 말도 붙이지 못했다
누군가 초례를 마치고 신행 가던 길이
다시 누군가의 상여로 돌아오듯
나는 떠돌았던 지난 생이 부끄러웠다
무엇이 우리를 그 밤에 살게 하였을까
어허, 눈이 내리는데
눈이 내가 걸어온 길을 지우는데
내가 무엇을 더 서러워할 것인가
텅 빈 점방에서 주인장도, 주전자도 깜박 잠이 들고
물이 혼자 끓고 있었다
- 시집 <살고 싶은 아침>에서, 2000 -
*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와 결을 같이 하는 또 하나 인생의 시다.
대설주의보 내린 점방에 모여 나누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그 소소한 이야기,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시간이 주전자의 물처럼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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