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김선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09회 작성일 21-02-13 19:53본문
맑은 날
김선우
동사무소를 지나다 보았다
다리가 주저앉고 서랍이 떨어져나간 장롱
누군가 측은한 눈길 보내기도 했겠지만
적당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갑절의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물림쇠가 녹슬고
문짝에서 먼지가 한움큼씩 떨어질 때
흔쾌한 마음으로 장롱은 노래했으리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을 배반한 것들은 아름답다
솟구쳐 쪼개지며 다리를 꺽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때
돌팔매질당할 사랑을 꿈꾸어도 좋은 때
죽기 좋은 맑은 날
쓰레기 수거증이 붙어 있는
환하고 뜨거운 심장을 보았다
- 시집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에서, 2000 -
* 사랑하기 좋은 날, 무엇보다 죽기 좋은 날은
내 오랜 것들을 햇살과 광맥에게로 돌려주는 그 때.
영화보다 먼저 시인이 사용한 그 말, 거 참 죽기 좋은 날이구만.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