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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 원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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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1활연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61회 작성일 21-02-13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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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원재훈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에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 한다




【감상】

은행나무는 공룡이 오가던 시대부터 있었다. 메타세쿼이아나 양치식물이 그렇듯이. 우산을 쓴 기다림은 아마도 수만 년의 시간일지 모른다. 이 시 또한 제법 오래전에 씌어졌다.

빗방울-강물-바다-우주 끝-다시 빗방울-나도 한 방울 물방울, 점층에서 점강으로, 거시에서 미시로 기다림은 참 곡절도 많다.
그대-어쩔 수 없는-잎-나뭇잎-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따뜻한 습기- 가슴을 적시는 그대.
나도 작아져 한 장의 나뭇잎-비를 맞고- 누굴 기다리니-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내 삶에 그대가 오는 아름다운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 한다.

이 시의 알레고리(다르게 말하기)는 연애의 문법을 차용했지만 내심적 언어는 달리도 읽힌다. 삶은 간곡한 연애이거나 지독한 결별일지 모른다. 언술의 알고리즘 또한 유연하고 미려하다.
시에 드러난 이미지는 단순하다. 시어들이 갖는 조응은 눈부시고, 작은 지점이 우주까지 다시 한 장소의 물방울로 수렴하기까지, 철학적 사유는 싱싱하고 또 개연성과 견련성으로 우주의 질서를 그리듯, 아름답다.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이렇게 무궁과 궁극에 닿는 의미라면, 이 시는 너무나 쉽고 동시에 너무나 어려운 시다. 시어의 알고리즘에서 일탈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진동과 큰 아우라를 가진다. 시는 추억을 소환하는 고전적인 모습처럼 그려졌으나, 이 시의 내면은 미래가 가진 알 수 없는 존재와 진지와 진정성을 아우르고 있다.

그렇다면, 어렵다 쉽다는 어떤 경계일까?

시를 쉽게 쓰는 건 참 어렵다.
쉬운 건 오기도 쉽지만 나가기도 쉽다. 좀 알았다 싶으면 뒤도 안 본다. 그 속을 다 알았으니, 뭐 뻔하다는 식이다. 쉬운데도 오래 남는 게 있다. 잊을 만하면 다시 읽고 싶은 시가 있다. 우선은 정서의 코드가 맞아야겠지만, 혹시 못 본 게 있나 궁금해지는 것이다.

물방울이 강물로 기꺼이는 우주까지, 다시 물방울로 돌아오기까지, 한낱 글자의 조합일 것이나, 철학이 있고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드나든 기척이 있고. 예측할 수 없는 기이한 그림이 아닐지라도, 시의 등에 기대 한참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어느 날의 기미일 것이며 훗날의 예감일지도 모른다.

시를 어렵게 쓰는 건 참 어렵다.
어렵다는 건 오기도 전에 버려진다. 핀잔을 듣기 일쑤다. 사는 것도 복잡한데, 시에서조차 골머리를 앓기는 싫은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상은 단순할수록 좋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내가 아는 범주에서 떠돌면 된다.

가축이 제 집을 벗어나면 두려워하듯이 가축정신을 가지면 그만이다. 그런데 왜 어려운 시가 발생할까? 다중의 핀잔이나, 삿대질이나, 그런 요상한 식이니까 안 팔린다는 상업적 성토나 구호의 희생양이 될까. 중뿔난 인간의 현학적 허세인가.

궁극적으로 시는 아름다운 언어다.
우리는 오래전 퇴폐적 감상주의에서도 충분히 위안을 받았고 시를 아름다운 언어라 했는데, 왜 잘난 척을 하는가 등등, 시를 언어 세공하듯이 공들여 쓰고 첩첩의 의미를 담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입맛과 다르니까, 헛삽을 뜬 것인가?
그렇다면, 인문학의 상당수는, 폐업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난이도의 문제는 각자 선택의 문제이다

나는 쉽게 쓴 시가 더 어렵다. 나는 어렵게 쓴 시가 더 어렵다. 시는 어렵다.

시 읽기는 즐거운 고행
고도의 정신작용이 언어와 만났을 때 모든 상황은 내게 고난과 시련이다. 읽는 시점이나 시차에 따라서도 시는 달라보였다. 전혀 몰랐던 것도 알아지는 때가 있었다. 알아진다는 건, 내 의식과의 결탁이다. 내 식으로 들였다는 뜻이지, 시의 퍼즐인지 암호인지를 풀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알았다는 것은, 사실은 그 시를 이제 놓아주겠다는 뜻으로 한다. 그러니 다 아는 것보다 좀 몰라서 오래 그 자장 안에 머물고 싶어지는 시는 있다.

자주 읽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시, 자꾸만 안기는 시. 좀 들여다보라고 재촉하는 시.

가라사대
BC 384년에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을 썼다. 예수님과 언어적으로 동기동창이거나 시기적으로 더 선배일지 모른다. 성경의 시편 또한 시 미학의 요체다.

시는 목숨이 참 질긴 놈이다. 이 놈과 대적해서 한판 벌이는 건, 그다지 거룩하지 않는 인간이 덤벼볼 만한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시를 잘 읽을 수 있는 눈을 갖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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