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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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22회 작성일 21-03-30 09:23본문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진은영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공(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 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 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 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中論),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 시집 <훔쳐가는 노래>에서, 2012 -
* 가장 실생활적인 것이 가장 지고한 관념의 희열을 이끌어낸다.
시인 자신의 온갖 치부를 드러내지만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하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뭐, 시를 우리는 읽고 때론 쓰기도 하지만 이런 시는 드물다.
아름다운 세탁소에 오늘 한번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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