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쬐다/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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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64회 작성일 21-04-05 17:51본문
사람을 쬐다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씨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눈가가 짓물러진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 시집 <저녁의 슬하>에서, 2011 -
* 너무 유명한 나머지 유행가처럼 말하는, '군중 속의 고독'은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햇빛을 쬐지 않으면 꽃, 나무, 사람은 쪼그라들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을 쬔다는 건 햇빛을 쬔다는 말과 동의어다.
또 다른 의미로 나는 좋은 시를 읽는 것도 질 좋은 햇살을, 사람좋은 누군가를 만나는 거라 생각한다.
좋은 시 쬐는 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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