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계절/박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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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18회 작성일 21-04-18 10:17본문
가여운 계절
박소란
가볍다를 가엽다로 읽는다
허공에서 길 잃은 구름처럼 새처럼 가여운 것이 있을까, 하고
창을 열면
늦여름의 주름진 햇살이 고꾸라지듯 밀려든다 참 가엽게도
플라타너스의 바랜 옷자락을 붙들고 선 저 잎새는
어제보다 오늘 더 가엽고
초록의 실연을 훔쳐보던 사람들의 눈빛도 덩달아 가엽다
가여운 저녁의 발걸음으로
슈퍼에 가 수박을 한덩이 산다
이 크고 단단한 것을 껴안고 콘크리트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란
조금도 가엽지 않은 것,
가엽다를 가볍다로 읽어야 한다
위층에서 걸어내려오는 너의 인사는 깃털 같다
내게서 황급히 멀어지는 네가
나는 가볍다
-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에서, 2019 -
* 경쾌한 시다.
가벼운 듯 가볍지 않은,
어쩌면 언어의 유희 같지만 읽는 즐거움을 가볍지 않게 던져준다.
시라는 게 읽는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주제의 무거움은 어디에 쓸까.
주제가 무거울수록 가볍게 쓰는 법을 시인에게서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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