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蘭)/박목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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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62회 작성일 21-05-21 18:50본문
난(蘭)
박목월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 시집 <蘭.其他(난.기타)>에서, 1959 -
* 오늘 숲길에서 아름드리 물푸레나무 몸통을 침략자처럼 침공해선,
빼곡히 들러붙어 있던 푸른 이끼를 보며,
저것도 시가 될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이 시가 떠올랐다.
고교 시절 교정의 히말라야시다 밑에서 가슴 벅차게 읽었던 그 시가.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시란 이런 것이로구나.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로구나.
좋은 시는 오랜 세월 잊고 지내다가도 언제든지 나를 방문해주는구나.
위로해 주는구나.
집에 오자마자 시를 찾아 읽고 또 읽었다.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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