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질 듯 바람계곡/임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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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52회 작성일 21-05-23 18:32본문
꺼질 듯 바람계곡
임현정
구멍 난 치즈처럼 보여도
중앙계단을 타고 오르면
꽤나 전망 좋은 절벽이에요
칠백번째 계단참에 제 방이 있어요 왼쪽은 아,
마침 루시 아줌마가 나오네요
계곡 아래에서 부는
돌개바람에 휩쓸린 사람들
간혹 빨랫줄에 걸려 있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저 아래서 부는 바람을
꺼질 듯, 한숨이라고 부르죠
난간을 꼭 붙들어요
손수건처럼 휙
날아가기 전에
견학을 온 여자애가 울고 있네요
지갑이 없어졌다는 건데
동무들은 어쩌지도 못하고
바람 불 때 보았죠
빙글빙글 날아가는 노란 지갑
둥글게 부푼 공단 치마 아래
푸른 지폐들까지
꼭대기 방은 미완성이에요
손톱이 자랄 때까지만 쉬고
다른 사람이 안내할 거예요
어떤 여행자들은 여길 떠나지 못해요
어깨를 스치는 좁은 계단과
숨소리가 들리는 작은 방
검게 빛나는 눈동자 때문이죠
그래서 손톱 밑은 붉고,
부드러운 흙이에요
-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에서, 2012 -
* 헤르만 헷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백석, 정지용 등
여행시를 자주 썼던 시인들이 있다.
여행은 시의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대부분의 시인과 철학자들은 산책과 여행을 통해 그들의 깊이를 다져 왔다.
귀라는 안테나를 쫑긋 세우고, 눈이라는 등대빛을 비추면서,
시인은 여행을 한다.
그리고 그 여행은 필연으로써의 시를 잉태하게 된다.
시가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 그래도 시가 살아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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