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시/곽재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31회 작성일 21-06-27 20:32본문
세상의 모든 시
곽재구
나는 강물을 모른다
버드나무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둘이 만나
강물은 버드나무의 손목을 잡아주고
버드나무는 강물의 이마를 쓸어준다
나는 시를 모른다
시도 나를 모른다
은하수 속으로 날아가는 별 하나
시가 내 손을 따뜻이 잡는다
어릴 적 아기 목동이었을 때
소 먹일 꼴을 베다
낫으로 새끼손톱 베었지
새끼손톱 두쪽으로 갈라진 채 어른이 되었지
시가 내 새끼손톱 만지작거리며
괜찮아 봉숭아 물 들여줄게 한다
나는 내 시가 강물이었으면 한다
흐르는 원고지 위에 시를 쓰다
저녁의 항구에서 모여드는 세상의 모든 시를 읽을 것이다
-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에서, 2021 -
* 시를 왜 쓰고 또 왜 읽는가, 라는 질문에
시가 내 아픈 새끼손톱 만지작거리며, 내 강물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할 수 없다면 조금은 허탈할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를 만져주고 나를 살게 해주었던 시들 외에는,
읽고 난 후엔 대부분 안개처럼 사라져갔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상을 받은 시라 할지라도, 남들이 좋은 시라고 소개해줘도,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면 남이다.
'저녁의 항구에서 모여드는 세상의 모든 시를' 읽는 것보다
내 마음 항구에 입항한 시를 꽉 붙들고 오래 사귀며 늙어가는 것이 내 소망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