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을 꺼내어 주머니에 넣고/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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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12회 작성일 21-06-30 19:55본문
내 눈을 꺼내어 주머니에 넣고
정영
걷는다
눈뜬 자들의 막막함으로 새들은 날아오르고
안개가 걸음 묶으며 언 땅속 같은 관계를 부추기는
새벽
나의 애인은 장님
나는 우리의 관계를
모두가 잠들어 있느라 아무도 봐주지 못한 개화(開花)라 발음한다
눈뜨라, 주머니 속 두 눈아
나의 애인은 꿈꾸는 장님
문 열면 사막까지 펼쳐지는 아뜩한 공원
거기, 줄 끊긴 연 너풀대는 한그루 나무
그 아래 오래도록 내가 있다
감은 눈으로도 우는 노을과 뚝뚝 떨어지는 과실 같은 별과
가슴을 찾느라 허공을 더듬는 다섯 손가락과
입맞추기 위해 늪으로 빠져드는 긴 혀와
여덟 굽이의 고개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안개와
빛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어둑해진 들판과 전봇대에 걸쳐진 새들의 비행
그 앞에 나의 애인이 서 있다
바라보고 있었다
두번째 애인도 세번째 애인도 장님이 되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관계가
모두가 웃고 떠드느라 아무도 봐주지 못한 낙화(落花)라 발음한다
나의 애인은 풍경 바라보길 좋아하는 사람
거기, 우리 누웠다 온 자리 들여다보는 일 막막하고
아직 가시지 않은 우리 체온을 지우러 온 아침별 바라보는 일 더 막막하니
영원히 눈감으라, 주머니 속 두 눈아
- 시집 <평일의 고해>에서, 2006 -
* 시인은 개화할 땐 눈뜨고, 낙화할 땐 눈감으라 한다.
다만, 두 눈은 주머니 속에 넣고.
어쩌면 장님이 더 예민하게 듣고, 더 상세하게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묵직한 시를 읽으며 눈을 감고 풍경을 바라본다.
나의 애인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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