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유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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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11회 작성일 21-07-09 18:15본문
발
유병록
지나간 고통은 얼마나 순한가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발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가만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길들여진 고통은 얼마나 순종적인가
사나운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의 일
네 발이 내 것 같다
말을 듣지 않고 날뛰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너를 껴안으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위험한 길
참을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
발을 어루만진다
발가락을 하나씩 세어본다
내 발이 네 것 같다
너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네 등은 따뜻하고
나는 그 커다랗고 우멍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에서, 2020 -
-발은 중력과 나의 모든 하중을 스스로 견디고 있다.
그것은 고통의 길이다.
한마디 불평도 없이 가는 순종의 삶이다.
그 우멍한 눈동자 한번 보여주지 않고 가는 길이다.
오늘,
나를 업고 다니느라 족저근막염 걸린 내 발을 진하게 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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