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말/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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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12회 작성일 21-07-30 17:49본문
용서라는 말
김승희
내가 오늘은 용서라는 제목을 가지고 좀 생각해보련다
용서를 받고 싶고 용서를 하고도 싶은데
썩은 감자같이 꽉 쥔 주먹에서
상처가 생기고 헐어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감자 궤양병같이 피가 나는
주먹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자들을 끊어낸 뒤에
따스한 햇빛 아래 손금을 좀 말려야 한다
햇빛은 손금 위로 포실포실 떨어지며
금방 노란 병아리들이 어디선가 줄지어 걸어나올 것만 같다
꽉 쥔 주먹을 펼 때마다
금세 손바닥으로 토실한 감자들이 주렁주렁 따라 올라온다
언제 받은 분노인지 수모가 아직도 살아
주먹 아래
손금이 말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많다
요즈음엔 이메일 끝에 '진심을 담아 사랑으로'라든가
'사랑을 담아 진심으로 '라든가
뭐 그런 말을 꼭 붙이는 것 같다
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무엇을 남에게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진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려면 일단 주먹을 양산처럼 활짝 펴야 한다
용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주먹을 펴서 진심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분노는 천사보다 명이 길다
그렇다면 오늘 용서라는 제목으로 말을 끝내기는 어렵다
먼저 진심을 찾은 후에
주먹에서 감자를, 아니 감자에서 주먹을 다 뽑은 후에
다시 만나 용서를 논하기로 한다
그럼 다음에, 안녕히
-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에서, 2021 -
- 용서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진심으로 용서하기란 어렵다.
내 손에 꽉 움켜쥔 분노의 싹들을 모두 놓아야 가능하다.
줄줄이 감자 줄기처럼 쥐고 있는 분노는,
천사보다 수명이 길어서 나를 진심이지 못하게 만든다.
시를 쓰기 전에 시의 마음을 갖기가 어렵듯,
용서를 말하기 전에 용서하는 마음을 갖기도 어렵다.
그러나 용서해야만 용서 받는다는 이 진실,
그래서 사는 게 어려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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