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의 책/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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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22회 작성일 21-08-07 17:50본문
갈색의 책
이제니
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서 말할 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 검은 것, 검은 것 위에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려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2010 -
-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책들을 읽는다.
또 글을 모르는 우리 어머니처럼 단 한 권의 책을 읽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같은 책을 읽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흰 것 위에 검은 얼룩이 있었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검은 것 위에 흰 얼룩이 있는 책이었다고 각각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책들은 어찌어찌 해석을 당한다.
그러나 겉장이 떨어져나가고, 제목도 없는 나라는 책은,
일평생을 골똘히 읽어도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해석하려 대화를 한다.
또 시를 통해 대화에 끼어들기도 한다.
그것도 어려우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해석되어 가기도 하니깐.
그러니깐 이 시는 책에 대한 게 아니다,
죽을 때까지, 해석되어가는 중인 갈색의 사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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