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시집 읽기/양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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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78회 작성일 21-08-21 18:47본문
자기 시집 읽기
양애경
참 이상하다
새로 나온 내 시집을 무심히 들고
한두 페이지 넘겨보다가
첫장부터 끝장까지 읽고 말았다
그러곤 혼자 흑흑 느끼며 운다
거기에 '내가 슬프다'고 쓰지 않았는데
'나는 운다'라고 쓰지도 않았는데
요즘 상당히 신랄하고 꼬여서 어머니까지도
'그땐 너 지금보다 순수했지'라고 말할 정도인데도
다 정리된 그 감정들을 읽으며
운다 독자들도 울지 않을 텐데 그래 그러니까
작자니까 우는 거겠지 그러면
중학교 1학년 때 청소년회관에서 5원 내고 본
「국군은 말한다」 뭐 그런 영화에서
주인공의 전우쯤 되는 사람이
총을 맞고 막 울면서 8분쯤 걸려 죽을 때
관객인 우리, 중학생들이 막 웃었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걸 울며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픽 웃고 마는 시들을 보고
나 혼자 눈시울이 시큰,
그렇게 된 건지도 몰라 나도 늙어가는 걸까
그래서 나는 전원을 넣고
워드프로세서로 '나는 운다'고 쓴다
그리고 드디어 눈물이 말라서
응 그래 맞아 난 요새 잘 울지 않잖아라고 속으로 뇌이면서
머리를 묶은 고무줄을 잡아당겨 뽑고 지퍼를 열어 티셔츠를 벗고 양말을 벗어 던지고 방문을 잠그고 불을 끄고 눕는다
그리고 메말랐음 약간 안도하며
마른 흐느낌을 두어번 더 흑, 하고 내어보고는
뺨에 한쪽 손을 대고
잠이 든다.
- 시집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에서, 1997 -
- 과거의 시는 이미 정리된 내 감정과 분위기가 박제되어 있는 것인데,
세월이 흐른 어느 밤중에 다시 꺼내어 읽어 본다면 또 다른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남은 웃으며 지나갈 글과 말도
속사정이 생각나면 흑, 하고 우리는 흐느낀다.
그래서 '자기 시집 읽기'를 '자기 마음 읽기'로 바꾸어 읽어 본다.
시인의 잔잔한 기억이 시를 통해 내게로 온다.
가을이 문 밖에 서 있는 이 저녁, 이런 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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