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앞에서 / 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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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08회 작성일 21-09-10 08:28본문
국화 앞에서 / 김재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 살아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시인의 약력>
김재진 시인, 소설가, 1955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
1976년 영남일보,조선일보 신춘문예, 작가세계 신인상.
시집으로 <가슴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연어가 돌아올 때>,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와 장편소설 <하늘로 가는 길>, 동화집 <엄마의
나무>, <어느 시인의 이야기> 등이 있다
<감상>
너무나 많이 읽고 애송했던 서정주 시인의 시, <국화 옆에
서>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그냥 지나치고 싶었는
지 모른다. <국화 옆에서>가 사연 많은 삶의 질곡을 누이
에 담고 가을에 담아 피어낸 꽃이란 의미 말고도, 야생이
피어내는 마지막 계절인 가을을 방점으로 찍는 꽃, 그래서
국화가 가져다주는 정결해 보이면서도 탐스러운 꽃의 시라
고 한다면, 김재진 시인의 <국화 앞에서>는 국화꽃을 좀
더 현실 앞으로 당겨다 놓고 우리 삶을 대조해보는 세밀
함으로 묘사되었다고 생각한다. 깊은 사유와 서정에서 삶
의 여정을 직접 대조해 봄으로서 바로 직관할 수 있는 나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또한
현재 국화꽃이 많이 상징하고 있는 근조의 모습에서 바라
볼 때도 망자를 떠나보내면서 망자의 삶을 투영해보며,
우리의 삶 또한 반추하게 만드는 꽃이라 생각되어 시인이
묘사한 <생각하는 꽃>,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는 꽃>,
그리고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꽃>의 이미지로 만들어보
게 하는 힘이 있다. 때로는 내가 국화꽃으로, 그리고 때로
는 국화꽃 앞에서 벌과 나비와 또 관람자의 모습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게 만들어 준다. 책 속에서, 방 안에서,
장례식장 안에서가 아닌 야생에서의 국화꽃 향기를
마시고 취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