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표절/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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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69회 작성일 21-09-17 22:52본문
불멸의 표절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대는 저 장다리꽃을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자리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를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닝닝 허공에 정지한 벌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했던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픈 매듭을 베껴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의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당신 몸을 표절할래
첫 나뭇가지처럼 바람에 길을 열며
조금은 글썽이는 미래라는 단어를
당신도 나도 하늘도 모르게 전면 표절할래
자, 이제부터 전면전이야
- 시집 <와락>에서, 2008 -
- '사물은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의 '일언론(一言論)'은 이렇듯 완전히 새롭고도
독창적이며 가장 적합한 단 하나의 단어를 찾아 작품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려 노력해야 한다.
나는 학창시절 '소설기술론'이란 책을 읽으며 '일언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지금도 수시로 되새긴다.
허나 이게 쉬운 일이던가.
내가 생각하는 것은 누군가가 이미 생각했던 것이고,
내가 쓰려는 표현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먼저 사용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땅 위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표절을 하며 쓰고, 또 말하고 생활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가 우리를 옥죄어도 신선한 표현을 찾으려 부단히 애쓰고,
시인의 시처럼, 기분 좋은 표절을 하며 살아야 하리라.
그러니깐 항상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전망을 가진 창을 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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