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리 아라베스크/이혜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45회 작성일 21-09-19 09:38본문
피어리 아라베스크
이혜미
쇄빙선도 없이, 오늘 나는 버려진 성의 이름을 가진 이곳에 이르렀네 추위는 한결 가셔 나에게는 아직 몇개의 발가락이 남아 있네 그 무성한 꼭짓점들을 이어 안팎의 문양을 분명히 한 자리마다 세심하게 치장된 빙영(氷映)들이 점점이 돋아났네 북극의 수평선은 온도를 버린 광점들로 가득했지
빙궁의 벽에 볼을 대고 그것이 떨어져나가기를 기다렸네 가장 추레한 방식으로 얽히고 스며 단 한 줄로 이루어진 면(面)이 될 때, 신경은 자라나는 무늬 눈먼 돌산들과 얼음안개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었을까
얼음에서 물의 끈이 풀려나오고 있네 사람의 온도가 먼 지형의 모서리를 허무는 일이네 두 팔을 벌리고 극(極), 이라 발음할 때마다 품속에서 수평선이 팽팽해졌고 파문이 일어 끝을 모르고 뻗어나갔네
이제 그대는 남동으로 배를 돌리는가 아문젠, 나는 보존될 것이네 차고 말랑한 끈을 목에 감고 연분홍의 꿈을 불러들이면 감각의 끝단마다 발가락이 외롭게 자라나겠지
- 시집 <보라의 바깥>에서, 2011 -
- 그런 말이 있다.
과학적 인문적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읽어야 제대로 시를 즐길 수 있다.
무슨 소리, 괴로운 세상 머리 좀 식히려 차 한 잔 하듯 시를 읽는데, 복잡한 지식까지 익히라니.
둘 다 일리 있는 소리다.
그냥 자기 수준에 맞게 시를 즐기면 그만인 것.
억지로 강요한다고 감동과 여유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깐.
참고로 피어리는 최초로 북극점을 발견한 사람이고,
아문젠은 그 사실을 알고 방향을 틀어 최초로 남극점을 발견한 사람이다.
이 시는, 귀찮더라도 남극과 북극의 이야기를 알고 읽으면 감동이 배가된다.
문장이 기형도의 사실적이고 유려한 것과 비교될 정도로 아름답다.
얼마나 많은 공부 후에 이 시를 썼을지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시인은 북극의 얼음 빛과 아라베스크 문양을 절묘하게 버무리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