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의 값을 묻다/이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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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22회 작성일 21-09-26 20:20본문
도끼의 값을 묻다
이희중
본디 이 연장은
서 있는 큰 놈을 억지로 눕힐 때나
누워 있는 큰 놈을 세로로 쪼갤 때 쓴다
처음 알 때부터 이 연장을 무서워한 나는
아마도 이 연장의 쓸모를 오해하거나 과장하는 사람
아니면 스스로를 큰 놈 또는 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무의 공포를 타고난 사람
전생이 나무였는지도 모르는 사람
후생이 나무일지도 모르는 사람
피의 온기를 지키려고, 땔감을 장만하려고
햇살조차 차가운 산 바깥
면 소재지 길가에서 도끼의 가치를 묻는다
쇠붙이를 파는 젊은 여인은 이미 거래에 능숙하고
이 연장을 오해하는 나는 미숙하고 불편하다
- 숫돌에 갈아서 써야 하나요
- 꼭 그럴 필요 없어요
그렇겠지, 이 연장은
긋거나 자르거나 깍거나 다듬거나 미는 무엇
이 아니라 내리치는 무엇
칼보다는 망치의 혈족
벼린 날은 오히려 번거러울 따름
자주 산마을에 들어와 자게 되면서 난생처음
내 몸은 도끼를 든다, 본다, 들어본다, 흔들어본다
젊은 주인은, 사로잡은 사나운 짐승의 눈을 가리듯
종이봉투로 날을 감싸고
다시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서 건넨다
- 난, 나무를, 이미 죽은 나무를 쪼갤 때만 쓸 거요,
말하려다 그만둔다
- 시집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에서, 2017 -
- 분명 일상의 일을 글로 적은 것 뿐인데,
뭔가 깊은 것이 나를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시다.
시가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범행현장을 떠날 수 없는 형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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