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닦다/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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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97회 작성일 21-10-23 17:06본문
방을 닦다
문성해
이른 아침 방을 닦네
길게 자루 달린 걸레는 두고
오래된 수건을 적셔 방을 닦네
이처럼 오래 자신을 쓸고 비워낸 자가 또 있을까
이것은 십년 전 이사 때 난 생채기
대체 이 얼룩은 어디서 날아든 거지?
밤새 등이 눕던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내가 누운 나를 들여다보듯 방을 닦으면
방바닥이 거대한 거울 같네
거울의 구석구석도 이리 자주야 닦진 않지만
이 방을 닦을 땐 무릎을 꿇어야지
갸웃거리는 풀과
간지러운 모래들 대신
묵직한 방구들과
습진 가득 찬 내 등을 얹게 된
이 지구를 닦을 땐 무릎을 끓어야지
무릎을 꿇고
방을 닦아본 사람은 아네
내리뜬 눈과 구부린 심장 속에도
방이 있다는 것을
그 방들이 홀연 닦이고 있다는 것을
고즈늑한 이 방들 속으로
바람이 흘러와 책장을 넘기네
나비가 사뿐 경대 위에 앉네
- 시집 < 입술을 건너간 이름>에서, 2012 -
- 어쩌면 하찮은 것일 수도 있는 방 닦는 행위를 통해,
시인은 지구를 닦는다는 의미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위대한 것을 말한다고 부러 위대한 단어를 사용치 않는 현자처럼,
위대한 것은 일점일획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우주와 같은, 찬란한 단어만 골라 쓴다고 위대한 시가 되는 게 아닐진대,
그러니깐 시는, 제 방바닥을 먼저 닦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시인의 시들은 그런 의미로 단단하고 아름답고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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