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왔다/파블로 네루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68회 작성일 21-11-09 18:09본문
시가 내게로 왔다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 시집 <네루다 시선>에서, 정현종 역, 민음사, 2007 -
- 이 시의 많은 번역본이 있지만 나는 정현종 시인의 번역본을 가장 좋아한다.
일찍이 이 시를 읽고 내게로 오던 수많은 물결과 빛과 느낌들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네루다에게만 시가 이렇게 왔을까?
시를 쓰는 사람이든, 읽는 사람이든,
시는,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로 이렇게 왔으리라.
이젠
첫사랑 같은, 첫새벽 같은 시들에게로 내가 간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