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폭포, 그리고 숲/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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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4회 작성일 21-11-13 21:48본문
나무, 폭포, 그리고 숲
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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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가 서 있는 강 길을 걷는다 강 건너 마을에 하나둘 흔들리며 내걸리는 불빛들, 흔들리는 것들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구나 그래 별빛, 흘러온 길들은 늘 그렇게 아득하다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토록 나는 저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이구나
저 물길의 어디쯤 징검다리가 있을까 한때 나의 삶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 건너로 이어지던 길, 산 너머 노을이 피워놓은 강 저쪽 꿈꾸듯 흐르던 금빛 물결의 길을 물어 흘러갔다
그 강가에 지고 피던 철마다의 꽃들이여 민들레여 쑥부쟁이여 강 저편 푸른 미루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고 그때마다 산 그림자를 따라 새들이 날아올랐다
새들, 새들의 무덤을 보고 싶었지 나무들이, 바람이, 저 허공 중의 모든 길들이 풀어놓은 새떼들이 돌아가 눕는 곳 저 산, 저 물길이 다하여 이르는 곳일까 미루나무의 강 길을 따라 걸었다 따뜻한 불빛들이 목이 메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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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며 손짓하는 나무들의 숲에 다가갔다 숲을 건너기에 내 몸은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지나간 세상의 일을 떠올렸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들끓게 하였던 것들, 끝없는 벼랑으로 내몰고 갔던 것들, 신성과 욕망과 내달림과 쓰러짐과 그리움의 불면들
무릎을 꿇었다 꺽어진 것은 내 무릎만이 아니었다 울먹울먹 울컥울컥 너도 어느 산천의 하늘에서 길을 잃었던 것이냐 산비둘기의 울음이 숲을 멀리 가로지른다
3
굽이굽이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굽이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내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돌이며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일생을 수직의 삶으로 살아왔던 것들, 나무들이 가만히 그 안을 기웃거린다
물가에 앉아 잠긴다 지나온 시간, 흘러온 내 삶의 길, 그 길의 직립보행에 대해 생각한다 당당했던가 최선이었던가 그 물가에 다가가 얼굴을 비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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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그대 산다는 것은 가까이 혹은 멀리 마주 보고 있는 것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여주는 것 말없이 이야기도 가만히 들어주는 것 변함없는 것 나뉘지 않는 것 눈을 감을수록 밀려오는 것 밀려와 따뜻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며 오래오래 잊지 않는 것 함께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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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숲을 이루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와 그대와 그대의 그대와 그대의 모든 것들과 나의 어제와 나의 오늘과 나의 내일과
그 숲 속에 눕는다 언제인가 숲이 눕고 숲이 다시 일어났듯이 내 안의 삶들도 다하고 일어나기를, 오래 누웠던 자리에 숲의 고요가 머물렀다 한걸음 한걸음 그대 또한 그 숲에 멀어지거나 가까이 있었다
- 시집 <적막>에서, 2005 -
- 오늘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를 보다가 문득 이 시가 생각났다.
영화에서,
폴 고갱은 그림은 구상을 하면서 천천히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흐는 그림은 그 순간 단번에 그려야 한다고 응수한다.
둘 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고흐는 자신이 보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나는 시도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했다.
시인만의 아름다운 그 순간, 그 느낌을
전하려 시를 쓰는 것.
그림과 시는 다르지 않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깨달음을 음미하고 있는 와중에, 이 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시처럼, 고흐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그리고, 수직으로 서기도 하고,
때론 수평으로 누워 아파하며 살다가 영원의 문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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