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눈/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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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39회 작성일 21-11-18 20:18본문
밤 눈
기형도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한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서, 1991 -
- 살아있을 동안엔 단 한 권의 시집도 내지 않은 사내.
그나마 이 시집도 그의 사후에 평론가 김현에 의해 세상에 나왔으니,
그런데도 그의 영향력은 수십권의 시집을 펴낸 이들을 무색케 한다.
그의 시를 읽노라면,
모든 사물의 속을 열어 보이는 그의 감수성과 직관이 나를 떨리게 한다.
네 속을 열면,
내 속을 열면,
그리고 밤 눈처럼 그의 시를 맞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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