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김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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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29회 작성일 21-12-15 13:14본문
하필
김수우
문자가 왔다
몇달 시를 배우다 연락 끊긴 경조씨가 하늘로 떠났단다
근육병 앓던 장수씨 첫 시집 나오고 열흘 만에 흙이 되었단다
하필, 하필
오른쪽 왼쪽 구두처럼 두개 부고가 동시에 도착한
순간, 무명 시인 두 죽음이 총성같이 나를
뚫는데, 처음 본 몰티즈가 종아리를 물었다
시의 이빨이 박혔다
벼르고 벼른 듯
죄를 묻는 그 뾰족함, 그 증발, 그 입체성
노을이 왈칵 쏟아졌다
파상풍을 걱정한다 시를 떠났는가 시에 도착했는가
절룩거린다 어느 하늘까지 날아갔는가
소독약을 바른다 어디쯤서 바리공주와 마주쳤을까
백살 넘은 사람처럼 웃던 그들은 눈치챘던가
생이란 시커먼 멍이 잉크처럼 묻어나는 비밀 편지임을
감염된 순례들은 보이지 않는 데서 분열하며 뭉치가 될까
저 혼자 금 가고 저 혼자 아무는
바람의 건반들
향불도 없이 시의 그물눈들 어질어질 허공을 잇는다
파상풍 주사를 맞았는데도
이빨 자국 선명한 피멍은 며칠째 부어오르고
하늘 아래 누군가 시를 쓰고 있었다
- 시집 <뿌리주의자>에서, 2021 -
- 요 며칠 동안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다.
읽다가 자꾸 이 시가 눈에 밟혔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에 속이 꿈틀거려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왔던 파상풍처럼,
아직도 내게, 장미 가시의 가느다란 침투에도
반응하는 감각이 남아 있음에 안도했다.
내게서 감수성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흙이 되어버릴 것이므로.
그리고, 지금도 하늘 아래 누군가는 시를 쓰고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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