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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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86회 작성일 21-12-19 11:35본문
열다섯
최지은
그해 전학 간 그 마을
조퇴한 오후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뒷산에서 들려오던 개 돼지 닭 염소를 잡는 소리
그때 나는 사과를 씹으면서
식물은 망가질 때 가장 식물다운 소리를 냈다
또 한번 사과를 씹으면서
사람이 망가질 땐 어떤 소리를 낼까
시를 썼다
첫번째 고백은 새엄마가 책갈피 속에 숨겨둔 자목련 꽃잎을 조금씩 찢어버린 일
그걸 망가뜨리려고 책장 앞에서 놀다가 졸다가 읽다가
찢고 덮고 다시 찢고 덮고
오래 하기 위해 조금씩만 했던 일
사과를 씹으면서
집은 더 조용해지고
이제 거의 투명해져서
다시 사과를 씹으면서
소리 없는 오후
내가 사라질 것 같은 오후
너무 조용해
무엇이든 다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시를 썼다
-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에서, 2021 -
- 소위 자전적 소설이나 자전적 시는 별다른 상상력이 없이도 감동을 전해준다.
그냥 자기 이야길 담담히 써내려가는 것.
담담히 읽어내려가던 독자는 곧바로 눈치 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이야기란 것을.
외형적인 스토리는 다르더라도 감정의 결은 동일하단 것을.
그래서,
시인은 시를 쓰고,
가수는 노랠 하고,
아내는 밥을 푸고,
난,
그들의 이야길 다시 듣고 쓰고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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