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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평론] 다른 것 같은데 같은 것과 같은 것 같은데 다른 것 - 24시 빨래방/ 신영애외 2- 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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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57회 작성일 22-01-2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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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다른 것 같은데 같은 것과 같은 것 같은데 다른 것 

- 김부회 시인, 평론가 

* 24시 빨래방/ 신영애
* 노인 사육법/ 허유미
* 자율학습/ 문경수


  봄이 왔다. 4월이다. 목련이 망울을 활짝 개화하는 4월이다. 4월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목련이다. 4월의 노래는 모두가 아는 애송곡이다. 신정숙 님의 작품 속 (목련꽃 그늘 아래서)에 목련꽃을 보고 – 누렇게 날리는 저 포기의 각서들 - 이라는 절창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누구나 베르테르의 편지를 받고 싶고, 읽고 싶은 계절이다. 베르테르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이다. 주지하다시피 괴테의 자전적 소설로 유명한 작품이다. 또한,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 한 번쯤 생각을 깊게 해볼 수 있는 책이다. 시에서 사랑을 주제로 삼거나 소재로 채택한 작품이 많다. 그런 작품을 연시戀詩라고 말한다. 남녀 사이의 사랑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쓴 작품이다. 연시에는 많은 좋은 작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요즘이 많이 아쉽다. 사람의 속성은 사랑에 그 기초를 두고 사랑으로 인해 더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상례인데 유독 시단에서 연시는 약간 유치하다는 생각을 가끔 하는 분들이 있다. 읽기 나름이지만 필자는 연시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편이다. 연시에는 감정이 있고 느낌이 있고 무엇보다 진심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몇 마디 가식이나 허영에 자기감정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연시의 가장 기본인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시를 쓰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정시라 통칭하는 시의 연원을 따져보면 서정抒情이라는 단어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예술작품에서 자기가 느끼거나 겪은 감정의 정서를 서정이라고 한다. 서抒라는 한자어에 주목해 보자. 푸다. 물을 길어 올린다. 펴다, 토로하다, 펴지다 등등의 뜻을 함유하고 있다. 광의의 해석을 보태면 감정을 길어 올린다. 감정을 토로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을 길어 올린다는 것과 감정을 토로하는 것의 기초는 진솔이다. 꾸밈이나 포장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마음이라는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리는 것. 타인에게 토로하는 것을 서정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시는 이런 서정을 바탕으로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것들을 토로하듯, 이야기하듯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스스로 위안받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글쓰기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연시가 전부는 아니며 연시가 현대시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글을 쓴다면 연시에서 시작하는 것, 아니 서정을 기반으로 한 작품에서 시작한다면 적어도 진정성이라는 부분은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연시 한 편을 시 공부하는 곳에 제출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런 글은 쓰지 마십시오.’ 이런 글이라는 말에 상심했다. 이른바 연시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문단에서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김소월의 진달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대중성이다. 시를 읽는 독자의 대부분은 대중성에 근간을 갖고 있다. 문단에서 연시를 낮춰 보는 것은 대중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스로 대중성을 저하하는 요소가 된다. 3월호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라는 장르는 대중성과 아주 밀접하다. 대중이 기억하지 않는 문장을 어쩌면 생명력을 잃고 사라지는 문장이 된다는 말이다. 문학적 가치라는 말이 가진 배경의 어딘가에 대중성과 멀어지라는 말이 있는지? 아둔한 필자는 모른다. 현대시는 상당한 꼬임을 갖고 있다. 문예지 등에 발표되는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그달에 발표한 작품의 80% 이상이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대중성을 외면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비틀고 꼬고 좀 더 난해하거나 좀 더 외곽을 지향하는 표현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것이 마치 현대시의 사조인 양 오해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언어채집이라는 명목으로 영어단어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단어를 구태여 찾아 시를 쓰는 분들이 많다. 물론 이런 현상 역시 긍정적이며 진취적이다. 영어를 사용한다고, 잊힌 단어를 사용한다고 좋지 않은 작품이라는 가설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요즘은 더 발전하여 시 작품 속에 도표를 그린다거나 내비게이션 화면을 그대로 갖고 오는 경우도 많다. 볼수록 신기하고 신선하다. 나도 한 번쯤 그렇게 해 보고 싶다. 이런 발상은 어디서 시작한 것인지? 진화의 끝은 어디가 될 것인지? 연구하고 분석해 보고 싶다. 또한, 이런 다소 생뚱맞거나 의표를 찌른 발상과 표현이 효율적인 시의 영역적 진화를 초래한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너무 한 가지에 몰입하거나 한 가지에 편향적이라면 그것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최소한 시의 기본은 서정이다. 서정성을 근간으로 한 작품은 울림이 깊을 수밖에 없다. 비록, 채택한 단어들이 일상어이거나 구어체 문장이 많다 하더라도 삶의 한 부분이며 살아가는 우리가 일상으로 만든 일상이기 때문에 작품에서 공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시를 써도 좋다. 하지만 때론 서정시 한 편 써보는 것도 좀 더 다양한 시를 짓기 위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시는 한 작품의 전체보다는 작품 속 어느 한 단어에도 공감하거나 울림에 감동할 수 있는 문학 장르다. 필자의 저서 (시는 물이다)에도 소개한 작품이 한 편 있다.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아래 다시 소개해 본다. 

아내


홍형표


아내가 아프다
바라보는 내가 더 아프다

  짧다. 어려운 문장 하나 없다. 아내, 아프다, 내가, 라는 몇 개의 문장으로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더)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자. 바라보는 내가 (더) 아프다. (더)라는 단어에 비교급이니… 등등의 말을 덧붙이지 말자. 눈으로 읽어보자. 작품 전체가 아름답지만 (더)라는 단어로 인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아내라는 말의 뉘앙스와 (더)라는 말의 뉘앙스가 어우러져 현재 내 마음 상태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제를 꼬았다거나 본문을 비틀었다거나 한 것이 없다. 영어는커녕 한자어도 외래어도 없다.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누가 이 작품에 수저를 얹을 것인가? 작품이 유치해요 하던가 작품이 세련되지 못했어요 라던가 작품이 좀 그러네요 등등의 말을 할 수 없다. 필자는 이런 것을 울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울림이면서 동시에 감동을 준다. 문장의 세련미는 뭐라 말할 것도 없다. 더 아프다는 말의 진정성 앞에 아크로바틱한 현대시의 논법을 제기한다면, 그 논법이라는 것에 돌을 던지고 싶다. 필자는 올 초 신년 호에서 올 한 해 시를 쓰지 마시라는 당부를 드린 바 있다. 시를 쓰지 않는 시간에 (내가 더 아프다)라는 말의 깊이와 관조와 사람이 가져야 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을 좀 더 생각해 보시라는 권면을 드리고 싶다. 비슷한 구조의 시를 한 편 더 소개한다. 윤보영 시인의 작품 (커피)라는 작품이다. 

커피

윤보영

커피에 설탕을 넣고
크림을 넣었는데
맛이 싱겁군요
아~
그대 생각을 빠트렸군요

  이 작품 역시 일상어다. 커피와 크림을 영어식 표현이라 반론을 제기하면 할 말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대 생각을 빠트렸다는 말이다. 어떤 눈으로 읽으며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나도 후다닥 쓸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써보시길 권한다. 쓸 수 있는지? 필자는 위 두 작품의 공통점을 (일상)이라는 것에 두고 싶다. 시답게 쓴 것이 아니라 시, 답지 않게 쓴 작품이다. 마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는 안도현 시인의 말과 같은 것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많지만 중요한 공통점을 하나 더 말한다면 울림이다. 한 번 읽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곱씹어 읽게 된다는 말이다.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읽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내에 대해, 그대에 대해, 범주라는 카테고리에 구태여 넣는다면 윤보영의 커피는 연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시(?)에 불과한 작품일까? 아니다. 현대시다. 그것도 아주 잘 쓴 작품이다. 시를 쓰면서 많은 분들이 좋은 작품을 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작품을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만 크다. 그 답을 위 소개한 두 편의 작품에서 찾는 것이 어떨까? 흉내 내거나 차용하지 말자. 문장을 흉내 내는 것보다 생각이나 깊이, 진정성을 흉내 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전동균 시인의 (절)이라는 작품을 보자. 결구 부분을 잠시 인용해 본다. 


전동균


(중략)
누구일까, 어느새 내 곁에서’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보다 더 공손하게 절을 올리는 
저 사람은

  내 곁에 있는 저 사람은 나의 그림자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내 밖의 나일 수도 있고, 내 안의 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실체를 내 인식 속으로 갖고 왔다는 점이다. 실체이면서 실체가 아닌 것을 내 인식으로 가져와 실체를 만드는 시의 발화지점이 깊다. 내가 만드는 세계의 중심이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을 이중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바깥이다. 이야기를 갖고 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시 창작은 주관의 나와 객관의 내가 조합하고 결합하여 더 많은 공존을 만드는 것을 시 창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번 달 소제목은 다른 것 같은데 같은 것, 같은 것 같은데 다른 것이다. 두 말은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앞에 무엇이 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된다. 앞의 말은 신선한 느낌을 주는 문장을 만드는 방법이다. 뒤의 말은 기시감旣視感을 많이 주게 만드는 문장을 만드는 방법이다. 시제를 예를 들어본다. 시제를 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빤한 말을 시제로 하면 본문의 내용이 훤하게 보여 밍밍하다. 멋진 말을 생각해서 시제를 정하면 좋기는 한데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그런 고민을 필자에게 토로하면 필자가 하는 말은 늘 같다. 다른 것 같은데 같은 말을 생각해 보시라고 한다. 본문의 행간, 주제, 소재와 전혀 다른 말 같으면서도 본문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시제, 쉽게 말해 고래라는 소재를 의인화 혹은 은유로 글을 쓴다면 시제는 고래와 근친 관계가 있는 단어 혹은 문장을 갖고 오는 것보다 전혀 다른 단어와 문장을 채택하는 것이 더 본문을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시제는 본문의 주제나 소재와 전혀 다른 것 같으면서도 작품 한 편을 읽고 난 후, 아! 이 시제가 이래서 만들었구나 하게 되는 것이 가장 좋다. 아버지라는 시제로 글을 쓴다면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향수 내지는 그리움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시제를 (우물)이라고 정하고 본문에 우물에 대한 아버지와의 상관관계를 은유하여 아닌 척 쓴다면 읽고 난 후, (우물)이라는 시제의 적합성과 우물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확장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시제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제에서 파생되는 것은 문장과 행간이지만 더하여 상상력에 대한 제한이나 브레이크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포괄적이며 좀 더 깊은 행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혹은 작품에 대한 개연성의 범위를 넓히기 위하여 그에 맞는 시제를 선택해야 한다. 


  전체 문장이 개연성이 다소 부족하다 해도 시제가 그 부족한 부분을 커버할 수 있다면 잘 된 시제 선택이다. 시는 시쳇말로 아무 말 대잔치가 아니다. 개연성과 당위성이 없는 별개의 행간은 혼잣말로 들린다. 그 혼잣말과 혼잣말을 혼잣말이 아니게 만들어주는 것이 제목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시제, 제목은 작품의 처음이 아니다. 작품의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시제를 평이하게 만든다. 시제는 작품의 마지막이며 작품의 마무리다. 도입부가 아닌 결론이라는 말이다. 흔한 말로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보인다고 한다. 시제, 제목을 처음이라고 생각한 것에서 좀 더 시각을 바꿔 제목은 마무리다라는 사고의 전환을 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면 시제를 정하는 것이 한결 쉬워진다. 상상력의 확장이 무한대로 진행할 수 있다. 자칫 부족한 행간을 시제로 채울 수 있다. 다른 것 같은데 같은 것에 해답이 있다. 같은 것 같은데 다른 것은 작품을 방만하게 만들 소지가 충분하다. (모든 경우의 수를 포괄하는 말이 아님을 밝힌다.)본문과 다른 느낌의 시제를 정하고 본문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행간의 보폭을 만들어가자. 그 보폭의 너비와 폭은 기존의 내 작품이 가진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다. 환절기와 환절은 다른 말 같은데 같은 말이다. 환절기라는 절기에는 시간의 한계가 있다. 환절 속에는 시간의 한계를 포함한 모든 사고의 한계가 불분명하다. 시는 한계가 불분명한 사고와 성찰이 있을 때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증폭된다. 불분명한 사고를 분명하게 만드는 성찰은 상상에 제한이 없어야 한다. 제한이 없는 문장을 만들려면 선택하는 단어 혹은 행간에 스스로 묶어두는 것보다 스스로 자유로운 것이 좋다.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 달 소개할 세 작품은 비교적 쉽게 쓰면서도 작품이 가진 작품 성향이 깊고 무거운 작품으로 선택했다. 세 작품의 공통점은 다른 것 같으면서 같은 것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허유미의 노인 사육법과 같은 작품은 상당히 무거운 배경을 바탕으로 다소 거칠게 밀어붙인 점이 돋보였고, 신영애의 24시 빨래방은 현실과 요즘이라는 비슷한 어감의 시간과 상황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판단이 필자의 눈을 끌었다. 문경수의 자율학습은 비교적 젊은 감각의 사고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것 같다. 

  처음 소개할 작품은 신영애의 (24시 빨래방)이다. 빨래방이라는 새로운 프랜챠이즈가 동네마다 생겼다. 예전에는 빨래터라는 곳이 있었다. 흐르는 개천물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들고나와 빨랫방망이를 치대며 빨래하거나 수다 떨거나 하는 서민의 애환이 있는 곳. 빨래터는 마을의 전설이 시작되는 곳이었고 누구네 숟가락과 젓가락의 개수가 몇 개인지 밝혀지는 곳이었다. 지금은 그 풍경조차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득한 배경으로 남아 있다. 요즘의 빨래방은 말 그대로 24시간이다. 아무 때나 내가 편할 때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된다. 동전만 더 있으면 건조까지 된다. 볕에 말리거나 바람을 쐬거나 하는 과정이 생략된다. 세탁기에 빨래 넣고, 동전 넣고, 기다리면 된다. 끝나기만 기다리면 어느 표백제 광고카피처럼 ‘빨래 끝’이 된다. 신영애의 작품은 빨래방이 아닌 빨래방의 사람들, 빨래하는 사람들, 그 풍경 너머에 있는 빨래의 배경과 그 배경에서 파생되는 삶의 목적의식을 작품에 담아냈다. 인도에 가면 (도비왈라)라는 하층민(?)이 있다. - 그런 계급조차 언급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 도비왈라는 빨래를 천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남의 빨래를 해주면서 소득을 얻고 그 소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신영애의 작품은 그 점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들의 삶은 우리네 삶과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궤적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더러운 것을 세탁하고 대가를 받는 사람들. 그것이 인정하기 싫지만, 천형과도 같은 대물림으로 이어질 때, 그 모든 감정의 역할은 우리의 삶과, 살아가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좋은 작품이다. 

24시 빨래방

신영애

양버즘나무 뒤로 원룸들이 들어서자
사람들은 혼자서 가정을 완성했다

건물 안에는 한 마을보다 많은 사람들이 층간 소음을 견디며 산다

아리수가 흐르는 안길에
그 물길을 잡고 들어선 빨래터

동전 몇 닢에 온종일 빨래를 하는 도비왈라들

얼룩과 허물을 치대고 헹구고 탈수까지
스피드워시는 이십 구분

햇볕은 얇아지고 건조기는 쉬지 않고 돌아가지만
그들의 발목은 늘 젖어있다
젖어있다는 것은
배고픈 별들을 글썽이며 바라보는 것이다

질척거리다 사라진 빈자리
흐린 물에서 시작하는 가계家系는 거부할 수 없는 대물림이다
신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들의 신은 같이 빨래를 하고 계셨을까
치열하게 버티어도 가난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었다

기도하듯 두 손으로 내려치는 생애
작은 바람은 애벌빨래

힘겨운 하루가 쾌속 모드로 지나간다
사는 일만큼 찌든 빨래를 불리며
거센 물살도 거스르는
몸이 기억하는 도비왈라의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도비왈라의 삶과 우리의 삶과는 분명 다른 궤적을 갖고 있지만 (빨래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런 도비왈라의 삶의 현장과 묘한 대비를 보이는 시의 구성이 참신하다. 신영애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정체는 우리들이다. 지금 살고 있는 대다수의 우리, 그런 우리에 대한 신영의 관찰일지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양버즘나무 뒤로 원룸들이 들어서자
사람들은 혼자서 가정을 완성했다

건물 안에는 한 마을보다 많은 사람들이 층간 소음을 견디며 산다

한 마을보다 많은 사람들/층간 소음/ 사람들은 혼자서 가정을 완성했다/ 원룸/ 으로 구분되는 삶의 흔적들은 피곤이 먼저 떠오른다. 남과 같은 시간이 아닌, 남과 다른 시간의 빨래는 필연적으로 24시간이라는 시간에 묶여있다. 온종일이다. 구분 없는 시간의 환경 속에 시간을 내거나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그것도 빨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전을 넣고 빨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 아리수가 흘렀던 안길의 골목 어딘가에 새로 만들어진 빨래터라는 말이 아슴아슴한 기억의 저편을 꺼내기보다는 아릿한 삶의 단면을 더 부각하는 듯한 느낌이다. 빨래터 가진 아련한 향수가 아닌, 빨래터의 환경이 조성된 삶의 현장들이 현대사회를 조망하는 것 같다. 

동전 몇 닢에 온종일 빨래를 하는 도비왈라들

얼룩과 허물을 치대고 헹구고 탈수까지
스피드워시는 이십 구분

햇볕은 얇아지고 건조기는 쉬지 않고 돌아가지만
그들의 발목은 늘 젖어있다
젖어있다는 것은
배고픈 별들을 글썽이며 바라보는 것이다

빨래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빨래하는 현대판 도비왈라 (세탁기)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지만, 세탁기의 관점 역시 사람의 관점과 다를 것이 없다는 묘한 상상력이 좋다. 이 행간에서 시인이 선택한 단어의 조합을 보자. 그 단어의 어감이 가진, 어감의 뉘앙스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 시를 정확하게 읽는 방법이다. 

동전 몇 닢/ 온종일/ 얼룩과 허물을 치대고/그들의 발목은 늘 젖어있다/ 배고픈 별들을 글썽이며 바라보는 것/단어들의 조합을 면밀하게 관찰하면 신영애가 보는 세상이 보인다. 신영애가 보는 세상의 관점과 역할과 의무와 책임에 대한 시인의 관점이 보인다. 그것을 읽어야 한다. 만들어내 장면에 현혹되거나 그려지는 그림에 잠시 눈을 팔면 그 장면들의 배경을 읽어내기 어렵다. 배경이 가진 삶의 현학적 진실성을 잠시 착각하게 된다. 중요한 점은 /그들의 발목은 늘 젖어있다.라는 말이다. 그것은 도비왈라를 의미할 수도 있고, 세탁기를 의미할 수도 있고, 좀 더 확장하면 원룸과 혼자서 만든 가정에 대한 형태적 연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는 묘사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묘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현상에 대한 것인지, 현상 너머의 것에 대한 것인지 측량하기 어렵다. 다만, 필자의 관점에서 묘사는 반드시 왜? 라는 부호를 품을 때 묘사가 완성된다는 점이다. 묘사가 묘사에 그치면 묘사다. 왜? 라는 관점을 갖고 묘사를 하게 되면 방향성이 분명하다. 방향성이 분명한 묘사는 그 자체도 시가 된다. 묘사라는 것에 진중한 생각과 성찰을 입힌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선택이다. 단어와 행간의 선택을 유심하게 보면 작품의 성격을 파악하기 쉽다. 또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질척거리다 사라진 빈자리
흐린 물에서 시작하는 가계家系는 거부할 수 없는 대물림이다
신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들의 신은 같이 빨래를 하고 계셨을까
치열하게 버티어도 가난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었다

기도하듯 두 손으로 내려치는 생애
작은 바람은 애벌빨래

빈자리와 질척/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삶, 그리고 기도하듯 두 손으로 내려치는 생애는 작품의 배경을 짐작하게 만든다. 다른 말, 다른 환경, 다른 계급, 다른 사회이면서도 우리는 모두, 도비왈라며, 세탁기며, 원룸이며, 혼자서 만든 가정이다. 게다가 층간 소음을 견디며 살고 있다. 이런 점들, 면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신영애의 장점이다. 작품 속에 자신의 관점과 그 관점에 대한 깊은 성찰이 혼재되어 하나의 아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계家系라는 말이 대신하는 것은 아주 많다. 가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의미의 무게화다. 가난은 그들의 몫이었다는 말이 가난은 우리들의 몫이었다고 들리는 것은 몸이 기억하는 도비왈라의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는 결구에서 방점을 찍는다. 

기도하듯 두 손으로 내려치는 생애
작은 바람은 애벌빨래

본격적으로 빨기 전에 대충하는 빨래를 애벌빨래라고 한다. 기도하듯 두 손으로 내려치는 생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아주 작은, 미세한 바람이 애벌빨래라고 한다. 오래 기억할 문장이다. 신영애의 시는 곳곳에 시적 환기를 두었다. 그래서 대충 읽지 못한다. 좋은 작품이다.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허유미의 (노인 사육법)이다. 이 작품은 시제부터 눈에 쑥 들어온다. 사육飼育은 짐승을 먹여 기른다는 말이다. 노인 사육이라는 말은 노인은 먹여 기른다는 말이겠지만 본문은 애완견 사육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애완견이라는 말과 사육이라는 말 그리고 그 이야기의 풍경 속 배경은 전혀 다른 말 같으면서도 비슷한 스토리를 전개하는 다른 것 같은데 같은 이야기의 포맷을 가진 듯하다. 애완견 사육에 대한 이야기 중간에 /새 옷을 사줘도 꼭꼭 감춰둔 헌 옷만 찾아요/ 어느 시대든 혁명 앞에서 망설여요/ 등등 화자의 메시지가 선뜻하게 모양을 갖춰 노인 사육법이라는 시제에 대해 행간 중간중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화자의 의도적인 행간 배치와 애완견과 노인, 사육이라는 전제를 두고 작품을 읽으면 다소 그로테스크한 부분이 주는 긴장감과 행간 속 표현의 의도가 풍자라는 생각의 씨앗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허유미의 노림수는 아마 같은 것 같은 다른 말을 반복하거나 상황을 연계하면서 자연스럽게 허유미 시가 그리는 심상을 독자에게 전이하는 일종의 외곽을 공략하여 내곽을 완성하는 공성법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작품의 이러한 주제 공략법은 가장 처음, 시를 내 것이 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전혀 다른 별개의 세계가 아닌, 내 주변의 이야기와 흡사한 세계를 보여주면서 결국 허유미의 작품에 동화하게 만드는 시적 전개력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두 번째 효과는 내 것이 되게 만드는 효과로 친화력이 증폭된 문장 속에서 촌철의 날을 세워나가는 방법이다. 이러한 전개는 행간을 읽다가 화자가 내민 촌철에 감동하거나 반성하거나 성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 새 옷을 사줘도 감춰둔 헌 옷만 찾아요/와 / 새 옷을 사줘도 꼭꼭 감춰둔 헌 옷만 찾아요/에서 극명하게 보인다. (꼭꼭)이라는 강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부사의 역할은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생각의 깊이를 좀 더 깊게 만드는 효과다. 행간 자체가 무겁기도 하지만 (꼭꼭)의 역할론적 의미는 다소 평이한 문장의 질감을 웅변처럼 들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작품 중간에 화자가 선택한 단어 역시 /공동체 생활/종족/ 식용/ 통칭 값/몸속 녹물/ 등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쉽게 읽히는 듯하다 어렵게 다시 한번 더 읽게 만드는 진중한 작품이다. 쉽게 써진 작품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느낀다. 

노인 사육법

허유미

애완견을 키워볼 생각이라면
먼저 애완견 길들이기를 하세요.
애완견 기호에 따라 사료를 바꾸지 말고
주어진 양과 질에 배부르도록 만족 시키세요
새 옷을 사줘도 꼭꼭 감춰둔 헌 옷만 찾아요
어느 시대든 혁명 앞에서 망설이지요
배변 습관도 중요해요
애완견들은 본능적으로 공동체 생활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어서
주거지를 넘어 영역을 공유하는 족속들이지요
목줄이 필요한 이유가 충분 있어요
주인이 씻겨 주기 전까지
샅을 긁으며 하루 보내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제 샅의 냄새보다 다른 샅의 냄새를 잘 맡지요
눈깔이 달려도 색 구분을 못 하니
창을 크게 내줄 필요가 없습니다
기운 없이 낮잠만 자다가도
손님이 오면 신발을 물어뜯고 찢어 놓지요
달을 보며 울음을 울었던 조상 피가
제 몸에 남아 있다는 믿음으로 살거든요
종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동물이에요
요새는 옛날보다 지능이 좋아져
말귀를 잘 알아먹어요 길들이기 나름이겠지만
꼭 길들이기를 먼저 하세요
남들 키운다고 먼저 집에 덥석 들여놓지 마세요
동물관리법 때문에 함부로 버리지도 못하고
식용으로 팔지도 못하고 가둬놓지도 못한다네요
그래도 애완견이란 통칭값은 한다 합니다
마루 벽에 기대어 앉아 어떻게 하면
주인에게 남은 생을 사랑받을 수 있는지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넣고
봄마다 살짝살짝 녹는 귀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해를 오물거리고 달을 오물거리며
몸속 녹물을 뱉어내지요


소개 글에 이미 한 번 거론하였지만, 다시 주목해 보고 싶은 문장들이 작품 곳곳에 있다. 주목한 부분만 다시 발췌해 본다. 

1. 노인 사육법
2. 새 옷을 사줘도 꼭꼭 감춰둔 헌 옷만 찾아요
3. 어느 시대든 혁명 앞에서 망설이지요
4. 주거지를 넘어 영역을 공유하는 족속들이지요
5. 달을 보며 울음을 울었던 조상 피가 제 몸에 남아 있다는 믿음으로 살거든요
6. 꼭 길들이기를 먼저 하세요
7. 그래도 애완견이란 통칭값은 한다 합니다
8. 주인에게 남은 생을 사랑받을 수 있는지

위 발췌한 문장들은 허유미 작품의 근간을 볼 수 있는 행간이며 동시에 화자가 노인과 사육법이라는 단어로 조합한 작가의 의뭉스러우면서도 곡진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이다. 달을 보며 울음을 울었던 조상의 피에서 상기되는 일련의 원죄 혹은 천형과 같은 운명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지나친 상상의 확장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읽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주거지를 넘어 영역을 공유하는 말은 성찰의 깊이가 제법 강렬하고 무겁다. 영역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유라는 말이 가진 의미와 주거지가 가진 말의 무게를 좀 더 주제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사육의 범위와 한계는 노인이라는 말에 대한 사육법의 정당성과 당연시를 의미하는 중심적인 문장이다. 일종의 문장의 語幹 化 같다는 말이다. 어느 시대든 혁명 앞에서 망설이지요라는 말 역시 혁명이라는 단어의 깊이가 상징하는 것은 무한하게 많을 수 있다. 이렇게 다른 말 같으면서도 같은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중성화된 표현들이 많다는 것은 시를 내 것으로 體化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通稱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두루 사용되거나 불리는 말을 말한다. 통칭 값은 한다 합니다에서 보이는 통칭에 대한 의미가 진중하다. 하지만 그 부분 역시 통칭의 범주를 벗어나기 위해 통칭 값은 한다 합니다/라는 다소 부정적인 외곽의 말로 매듭지었다. 주목할 부분은 통칭 값은 하다. 가 아닌 통칭 값은 한다 합니다라는 한걸음 뒤에서 관조하는 듯한 화자의 자세다. 

사육이라는 말에서, 노인이라는 말에서, 혁명 앞에서. 달을 보며 울었던 말에서, 제 몸에 남아 있다는 믿음으로 살거든요 라는 말에서, 허유미가 독자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결구다. /주인에게 남은 생을 사랑받을 수 있는지/라는 단정 아닌 단정으로 의문을 증폭시킨다. 행간을 전부 끌고 온 힘은 확신이나 결론적인 주제 의식이다. 하지만 그 모든 주제 의식을 결구로 이끌면서 던지는 것은 /사랑받을 수 있는지/라는 말로 자신의 말을 다시 부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확한 의미에서 부정은 아니다.)이러한 형태의 시문 구조는 필자가 이번 달 소제목으로 말한 다른 것 같은데 같은 말과 사뭇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얼핏 보면 여타의 작품과 같은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다른 말이 경연을 대한다는 것은 시를 신선하게 만든다. 

허유미의 작품이 가진 질감은 평상복에 명품 가방을 든 것처럼 뭔가 어색하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루는 듯, 요즘 유행하는 말/무심한 듯 툭 걸친/과 같은 효과를 준다. 그런 점이 허유미 작품의 질감이다. 

  세 번째 소개할 작품은 문경수의 (자율학습)이다. 처음 시를 읽으면서 쓱 눈으로 읽었다. 눈으로 읽고 지나쳐 다른 작품을 읽다 문득 문경수의 작품이 생각났다. 또 한 번 읽었다. 그러다 지나쳐 다른 작품을 읽었다. 다시 생각났다. 몇 번을 고쳐 읽으며 시의 배경 속 (자율)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자율과 수학여행 경비 490,000의 상관관계가 눈길을 끌었다. 마치 도시에 살다 잠시 시골에 여행을 간 느낌. 여행에서 뭔가 도시와 다른 풍경을 보았는데 그 풍경이 이전에 내가 한 번쯤 보았던 풍경과 같은 느낌의 어떤 데쟈뷔deja vu 라고 하면 정확한 해설이 될 것 같다. 누구나 (확률상 누구나에 해당할 확률은 대다수 혹은 소수라고 중의적으로 말해야 할 것 같다.)시의 이야기는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수학여행 경비 490,000을 내야 하는데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는 동분서주, 꿔온 돈이 들어있는 봉투, 그 돈에 대한 화자의 생각이다. 적은 돈 일수도 큰돈 일수도 있는 490,000이라는 가격표, 수학여행의 가격표와 내지 못하는 것과 내지 못하는 사람의 빈 교실에서 공부해야 하는 것의 아이러니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를 자연스럽게 본문 그대로 읽으면 된다. 하지만 읽고 나면 분명하게 각인되는 말은 빈 교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수업은 남겨진 사람의 몫/이라는 말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같은 경험을 공유한 고등학교 시절의 어떤 기억이 되살아났다. 금액은 490,000원과 분명히 다른 가치 기능을 가진 화폐단위였지만, 그 빈 교실의 풍경과 남겨진 사람으로 낙인된 음습한 공간의 질감이 오랫동안 삶의 시간을 지배한 것 같다. 

자율학습

문경수


가정통신문에 적힌 수학여행 경비
490,000원
내지 않으면

빈 교실에서 공부해야 한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수업은 
남겨진 사람의 몫

기죽은 자식 달랜다고
어머니는 동네 곳곳을 누비며
꿔온 490,000원을 봉투에 넣어
손에 쥐여 주셨지
담임선생님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0 하나만 더 붙이면 되는데
0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데

그깟 게 뭐라고
왜 
사과를 받는지

급식소에 앉아
뭉칫돈을 꺼내
국에 말아 먹는다

배가 부른데도 욱여넣는다
아플 때까지
벌한다는 마음으로

그건 먹어선 안 되는 것이고
삼킬 수도 없는 것인데


0 하나만 더 붙이면 되는데, 0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데, 0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숫자 하나가 삶의 방식을 다양하게 만든다. 정말 0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이 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본이다. 제로는 제로가 아닌 또 다른 제로를 만드는 기축이 된다. 문경수가 말하고 싶은 부분이 그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제로는 제로가 아닌 또 다른 제로로 인해 담임선생님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하게 되고 나는 그깟 게 뭐라고 사과를 받아야 하고 빈 교실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제로가 된다는 것이 현대사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청년 실업률,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 상승만 하는 집값,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본래 가진 사람과 본래 없는 사람의 형평성, 490,000원이 뭉칫돈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문장과 490,000원이 그깟 돈으로 치부되는 사람과의 사회적 공생 관계는 평등이라는 기본권에서 한 발 뒤에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급식소에 앉아
뭉칫돈을 꺼내
국에 말아 먹는다

배가 부른데도 욱여넣는다
아플 때까지
벌한다는 마음으로

누가 무엇을 벌한다는 말일까? 내가 나를? 당신이 나를? 우리가 우리를? 몰 개념이 개념을? 현실이 이상을? 이데아가 ‘지금’을? 벌한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인지 아니면 벌 받는다가 옳은 표현인지 당혹하게 만들 수 있는 행간이다. 잘못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 대가로 주는 제재나 고통을 벌罰이라고 한다. 잘못? 죄? 대가로 주는 제재나 고통? 그 모든 행위의 주체는 누구일까? 

문경수가 꺼내놓은 이야기는 절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수학여행비로 통칭할 수 있는 내야 할 돈과 내지 못하는 사람의 빈 교실, 그 빈 교실을 자율학습이라고 이름 지은 反 자율학습이다. 자율학습을 하게 만든 것, 자율학습을 할 수밖에 없는 자율自律의 범주가 가진 무게는 상당한 사회적 병리 현상의 병폐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자율로 학습해야 하는지? 자율은 나 스스로라는 말인데 안 내면 가야 하는 징벌방의 개념으로 사용된다는 것의 배경 속 우리들의 자화상을 무겁게 비춰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시는 울림이다. 울림은 체화될 때 가장 크다. 다른 것 같으면서 같은 말이다. 결구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그건 먹어선 안 되는 것이고
삼킬 수도 없는 것인데

4월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목련이 핀다. 코로나 팬더믹은 여전히 확장 중이다. 작년 4월의 기고문에서 내년 4월은 활짝 핀 목련을 마스크 없이 보고 싶다고 했다. 일상에 대한 작은 소망이었다. 소망은 진행 중이다. 내가 나를 벌하지 말자. 이미 나는 많은 벌을 받고 있다. 내가 만든 빈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그건 벌의 대상이 아니다. 자율이라는 말을 붙여놓은 사람들의 몫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일지도 모를. 내년 4월, 몇 년 전 4월처럼 만개한 목련을 보며 베르테르의 편질 읽거나 쓰거나, 아니 편지는 없어도 좋다. 숨 쉬고 싶다. 가림막 없이. 독자 여러분의 건강을 진심으로 기원드린다. 일상이 저 앞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다 같이 만들어내야 할. (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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