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씻나락 담그는 풍경 / 고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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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rail2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0회 작성일 22-05-11 00:20본문
하느님의 죄마저도 다 드러내줄 듯한
청명도 쾌청명 아래
뭇 생명의 기미들 한결같이 제 생명의 욕구에
스스로 놀라 부르르 떠는 모습 생생한 날
내 또한 무슨 그리움 하나 찾아볼까 들썽이며
동네 한바퀴 돌러 나선다
봄은 와도 더는 심을 것 없는 마을에 봄은 짙어
앞집 뒷집 사방에 새하얀한 살구꽃 보니
문득 세상의 때 벗은 죽음 같은 것이라도
와락 눈앞에 달겨들 것 같고
사시장철 대숲에서 고요지경을 시샘해쌓던
바람의 흐름 속으로 살구꽃은 또 난분분 진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내 찾는 그리움은
이제 강아지조차도 얼씬 않는 고샅길도니
마을 앞 삼밭의 샛노란 장다리꽃무리가
광기로도 모자란 독기로도 모자란
원색의 화냥기로 자꾸만 꽃사래 쳐대고
그 위로 흰 나비 쌍쌍 비몽사몽 속인듯 날고
또 바람에 물결치는 앞들 초록의 보리 앞에서
일순 내 넋은 고압의 전류 흘러 깜깜하다
하지만 그 초록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왜 진즉 승천해버리지 못했을까
나도 예전엔 거기에서 보리피리를 불었었다
나도 예전엔 거기에서 애써 앙탈하던
사랑 하나를 눕혔었지만
이제 한사코 한사코 바람은 불고
이제 아니라고 아니라고 보리는 도리질치고
그 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재잘대는
종달새 노래에 나는 그만 문둥이처럼 서럽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길 위에서 길을 찾듯
그리움으로 그리움을 찾는 내 그리움은
썰렁한 회관 옆, 지난 겨울 끝내 반봇짐 싼
명수형 집의 박살난 대문이거나
거기 그가 남기고 간 한숨 탄식 눈물들 하나같이
푸른 노여움의 싹이 되어 돋는 마당이거나
지난 가을 심어놓고 미처 캐가지 못한
텃밭의 한자쯤이나 자라 있는 마늘싹
이제는 그 임자 없는 희망 속에나 있을까
익숙하던 길 위에서 문득 서먹거리는
이 쓰거운 마음의 행로
새벽이면 새벽같이 댓잎 뜬 각시샘에서 물을 긷고
저녁이면 저녁마당을 깨끗이 싸리비질해놓고
푸르른 연기를 곧게 피워올려 하늘과 내응하거나
새하얀 연기를 옆으로 흐트려 세상을 위무하던
생솔연기의 나라의, 어머니 아버지들의
곧고 부드러운 청신을 이제 더는 볼 수 없다
온통 나간 집 같다
다만 거기 파랗게 옷입은 길섶에
좁쌀 뿌려놓은 듯한 냉이꽃 마구 피어나고
그 귀여운 제비꽃은 오늘도 꾸벅꾸벅 인사하고
논둑에 빽빽히 돋은 서러움의 쑥잎은
거기 꽃다지 개불알풀꽃 쇠별꽃들 함께
이제 짙어버린 봄의 정액을 자꾸만 탐하는데
저 뒷들 몇몇 검은그루에 초벌갈이꾼도 있긴 하다
이 논 저 논 비닐하우스에선 김도 푹푹 새어나온다
하지만 저 뒷산 바우배기에서
이제 마악 들려오기 시작하는 소쩍새의 피울음
그 피울음 먹고 이제 마악 미친 듯 피어나는
저 묵정논의 핏빛 자운영꽃불은 누가 끄는가
어느 순간 걷는데 푸드득 날아오르는 들비둘기떼 쫓아
내로 산으로 달리던 함성이 환청으로 나 살아온다
그리하여 고독의 키가 무척은 자라면
저 갱변 미루나무처럼 연둣빛 이파리라도
온몸에 달고 반짝거릴 수는 있을까
거기 맑은 냇물에 은피라미떼가, 꿩 꿔엉
느닷없이 울리는 장끼소리에 놀라 뛰어드는
개구리 몇마리에 혼비백산하는 모습
물가의 빛나는 조약돌 함께 들여다보다간
냇물이 흘러가는 저 먼 콧을 또 한참은 바라보거니
이윽고 풀이란 풀은 다 성난 들을 질러
사방 사천 연두초록 물감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광경 한눈에 보이는 뒷동산에 오르니, 거기 지금은
조팝나무 새하얀 꽃자루가 자꼬만 끄덕이는 때
찔레꽃 말고 찔레꽃 속니파라가 마악 피어날 때
거기 지금은 비비비 우는 비비새거나
쭉쭉쭉 우는 머슴새거나, 한창
잡덤불 사이로 쫓고 쫓기는 사랑놀음으로 바쁜 때
그럴지라도 내 신명나는 그리움은
저기 발치 아래 가슴 저미도록 휑한 마을의
동구밖 정자나무에 있지 않다
그 위의 까치집 몇채에 있지 않다
하마 남은 집들은 진달래 꽃잎을 따서 술을 담고
하마 집집의 장독마다 햇간장 맑게 우러날지라도
한번 흘러버린 사랑의 뒤안길에서
슬픔의 버얼건 화농을 덧들일 뿐인 이 그리움
그러나 그러나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은
아까 윗뜸 샛길 접어오다
어느 집 담 너무로 그만
황망간에 바라보고 놀라 급히 고개 돌렸던
그 씻나락 담그는 풍경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다
바람도 알고 꽃도 알고 햇빛도 아는 일이다
지난 겨울 집채만한 외국산 태풍이
이윽고 이 들녘을 마지막으로 덮쳐
아버지도 어머니도 앞집도 뒷들도 농기계도
온통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저 폐허의 상처나 뒤적이던 나날 속에서
결국 씻나락만큼은 간수해왔더라니
그리하여 씻나락만큼은 그예 담그더라니
이제 그 아침 다시 오지 않으리라던 마을에
이제 다시 땅이 발정의 신열에 들떠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급기야 저기 저렇게 논 봇도랑에서
수많은 개구리들 암놈 수놈 업고 업히어 걀걀걀걀
불 앓는 소리 만발케 하는 그 힘 그 유정 속에서
가래톳 서는 내 그리움 하나쯤은 끝내 찾나니
봄햇살 융융한 봄날 보리밭 너머 저 지평선이여
뭇 생명의 싹들 무장무장 자라는
그 경이의 찰나까지 드러내줄 듯한 청명이여
온몸 다 문드러지는 절망, 그 뿌리에서 돋는
새싹의 욕구 하나로 또또 진저리치는 만물 위에
내 그리움의 금가루 은가루 마구 뿌려보나니
창비1995 고재종[날랜 사랑]
감상평 : [새벽 들]과 [날랜 사랑]을 읽었다
고재종 시인의 시에는 농부의 애환이 담겨 있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시다
두 권의 시집에서 백미는 4편이 되겠다
[대동, 저 붉은 저녁놀빛, 겨울숲은 저 홀로 정정하다, 저 씻나락 담그는 풍경]
이 가운데 [대동]과 [저 붉은 저녁놀빛]을 소개하지 못해서 아쉽다
읽는 내내 고재종 시인에 대한 기대감은 커졌으며 상응하게도 시는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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