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신화 / 김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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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rail2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9회 작성일 22-05-15 22:00본문
밤의 신화
평화
북소리. 나팔소리. 다채로운 행진곡이 울려오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갔다.
텅 빈 대낮의 거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오는 것은 북을 치며 걸어오는 코끼리와 그 옆에 서서 피리와 나팔을 부는 광대들이었다.
코끼리가 어떻게 저런 음악을 연주하나? 나는 창피한 줄 모르고 아이들처럼 서서 당당히 행진해 오는 코끼리를 구경하였다.
내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자 어진 코끼리의 둥그런 눈이 껌벅거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 더욱 신이 나서 악기에 떡떡 장단이 들어맞게 북을 쳐내었다.
이 거창한 행진의 뒤를 따르는 것은 아이들뿐ㅡ 아이들은 바지가 흘러내린 것도 모르고 어른의 걸음걸이로 또 달달거리면서 행진의 뒤를 따랐다. 코를 훌쩍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숨가쁨과 무한한 호기심이 비끼었다.
검은 가로수와 초연 냄새ㅡ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서 오늘이 무슨 날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가족도 동료도 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나만 혼자 이 거리에 나와 선 지금ㅡ 그러면 가족은 어찌 된 것일까?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네가 좋아하는 코끼리가 나팔을 불면서 오고 있구나!
나는 비로소 오늘이 무슨 날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 전쟁이 지금 바로 끝난 게로구나. 지금까지 나는 잠을 자고 있었나 보다. 그러면 나의 혈육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 수많은 도시의 자동차와 사람과 지상의 부귀영화는 모두 어찌 된 것일까.
그러자 이해 못할 행진의 배경이라도 장식하듯 코끼리의 음악대가 걸어오던 저쪽 서편 하늘가에서 푸른 광선이 공중에 번쩍거렸다. 그것은 원자탄보다 무서운 무기라 하였다. 그것은 바로 전쟁의 종언을 고하는 신호등이란 것을 순간 나는 깨달았다.
코끼리의 악대는 쉬지 않고 가고 있고 남루한 옷을 입은 아이들은 줄곧 코끼리와 광대를 따라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쉬지 않고 따라가고 있었는데... 이 광경을 망막에 담은 채로 내 한쪽 눈은 풀밭에 떨어졌고 다른 한쪽 눈은 허공의 한점에 박혀 있었다.
창비1985 김규동[깨끗한 희망]
감상평 : 전쟁의 아픔을 희망으로 채색하고 있다
연세가 많으신 분임에도 신세대 같은 시를 지으셨다
한 편이라도 고를 수 있는 작품을 남기셨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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