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무덤 / 김선우
페이지 정보
작성자 grail2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87회 작성일 22-05-22 00:00본문
1. 오월
꽃 지자 보였다
너이며 너희들인,
우리를 업고
달 쪽으로 열려 있는 누군가의 씰루엣
바람이 불 때마다
뼛속까지 아픈
나무 십자가들
2. 일월
누군가 죽었는데 울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새가 운다고 했다. 폭탄이 쏟아지는 건너편 땅을 바라보며 신을 가진 사람들이 브라보! 외쳤고, 창백한 가슴을 부풀리며 새가 고개를 파묻었다.
3. 삼월
더러워진 말이 집으로 돌아왔다. 안 보이는 곳까지 고름이 들어차 있었다. 더러운 피를 흘려보내야 했지만 고해성사와 바꿀 현금이 충분치 않았다.
소리없이 살해당한 말의 아기들. 조그만 관이 너무 많아서 작은 꽃들부터 서둘러 피어났다. 혀를 물고 자결한 새에 대해 묵언이 지켜지는 우방국의 국경에도.
4. 유월
애인은 퍼포머. 반짝반짝 빛나는 해골을 닦으며 춤을 추지. 아버지는 공장장. 평생토록 만두를 빚어 자식을 교육시킨 어머니를 가졌지. 어떤 날은 태아를 닮은 만두를 빚어 팔팔 삶은 후 꿀떡 삼켰네. 백살이 되도록 죽지 안는 할아버지를 위해 칼을 가는 손자의 손등이 간지럽네. 퐁당퐁당, 조상을 모르는 싹들이 동서남북 지천으로 발아 중이네. 가지 끝에서 퍽퍽 알전구가 터지네. 끄름이 앉은 나무 연꽃 냄새... 비린... 상복 입은 소녀가 조등을 걸며 꼭 다물었던 입술을 여네. 언니, 더러워진 내 말이 죽어가요 살겠다고 죽어가요 그런데 이눔아 죽긴 왜 죽어 살아야지 악착같이 왜 죽어가니 악착같이
5. 사월, 묵화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6. 시월
적막한, 눈동자들, 포커스 아웃된,
밀밭공장, 공장 가축들, 푸른 하늘, 세계는 자유,
주저앉는 소들, 으깨진 뇌수, 회색 은하수, 국경 없는 발랄한,
자유, 비애의, 자유-무역,
고통의, 기도의, 무한-리필,
적막한, 눈동자들, 뜨거운,
7. 십이월
응? 엄마를 갈아 먹이는데
내가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니?
어려서 죽은 내 아들
비애 덩어리 질긴 할머니가
으깨져 매일매일 입으로 들어오는데
컴컴한 몸속에서 죽어라 죽어라 훌쩍이는데
너라면, 응?
너라면 괜찮겠니?
미치지 않고, 응?
8. 칠월, 달무리
잘 익은 진흙냄새를 풍기는
달
와삭, 깨물어먹고 싶지만
아껴 먹어야 하니까
앞니로만 살살 부스러뜨려 먹는
진흙 부스러기 떨어지는
노란 달
부스러기들끼리 손잡으면
달무리가 생긴다
진흙쿠키를 닮은 달
달무리가 생기면 비가 올 텐데
진흙이 젖으면 배가 고플 텐데
무능한 신께서
배고픈 아기들을 가여워하시는지
혹시는 눈물인지
비가 온다
달이 지워진다
진흙쿠키가 녹아내린다
빗속에서 풍기는 흙냄새
먹을 수 없는
안타까운 흙냄새
9. 십삼월
이상하지 않니? 지구 곳곳 대도시의 거리엔 죽은 사람들이 걸어다녀.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 죽은 걸 잊어버린 사람들. 묘지가 없어도 서운하지 않은 사람들.
이상하지 않니? 식량은 충분한데 한편에선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 죽어가는 아이들 옆에서 배불리 먹은 걸 토하다 죽어버린 사람들이 걸어다녀. 색색으로 물들인 죽음들을 쇼핑하는 누군가들ㅡ
무덤 속은 시끄러워.
아무도 울어줄 사람이 없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고요하지?
창비2012 김선우[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감상평 :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댄스, 푸른푸른], [내 따스한 유령들]을 읽었다
김선우 시인의 시는 에코페미니즘 철학이 있다는 유머처럼 똥과 오줌 얘기가 많이 나온다
허나 내가 올리는 시는 그런 것들과 상관이 없이 장문의 시를 맛깔라게 쓴 것만 옮기기로 했다
그녀는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시를 지으며 채식주의자는 아니면서도 채식주의자 같은 표현을 쓴다
그녀의 시에서 배울 점은 일찍 철이 들어서 일찍 등단했다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감수성에 있겠다
잘 읽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