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북 -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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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96회 작성일 22-05-22 07:28본문
오래된 북 / 신용목
북은 온 몸이 입이다 남의 가죽을 빌려 짓고도 봉해진, 갇힌
말이 둥둥 앞뒤로 꿰맨 틀 속을 돈다 쳐야만 열리는 입, 아픔
으로만 살아 있는 것들이 있다, 둥둥둥둥 발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소리 같기도 한 요동이 고이고 고여 맑아진, 오래된 북의
안쪽에는 짚을 수 없는 허방이 있다 찢어봐도, 성대를 찾을 수
없다 번역할 수 없는 언어로 이승의 내막을 아파하다 사라질 뿐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 수 없다, 두 번의 수술 끝에 그는
호흡기를 달고 누웠다 심장소리가 둥둥 좌우로 꿰맨 몸속을 돈다
눈물로만 말하는 입 제 가죽을 찢어 열고도 스스로 봉한 입, 그는
온몸이 북이다 가끔 나는 북채가 되어 그의 옆에 눕는다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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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 생각>
수년 전에 사경을 헤매이는 동생으로 인하여,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있었지요.
이 詩를 대하니, 문득 병상에 누워있던 오래된 북 같은
중환자들 (거개가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던)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시인은 [오래된 북]을 통해서 탈육신(脫肉身) 혹은
탈구속(脫拘束)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북 안에 뭔가 갇혀있는, 말들을 끄집어 내고 싶었겠죠.
그리고, 암호 같은 그 말들을 이승의 언어로 번역해서
그 오래된 북의 북채가 되어 듣고 싶었겠죠.
제 동생이 누워있던 병상 바로 옆의 어떤 젊은 환자가
그의 아내와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하는 걸 본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그 무엇인가를
아내와 아이들에게 하염없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사랑한다는 말이었겠지요)
마치, 시에서 말하는 [눈물로만 말하는 입]처럼...
- 희선,
* 감상글에 따른 부록이라고나 할까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유품을 정리하던 아내의 눈에 들어온 건
그가 자주 쓰던 노트 사이에 끼워진 편지들이었습니다.
수신인은 자신과 딸이었습니다.
남편이 죽기 전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였습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면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나는 내 장례비용 때문에 당신이 힘들어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죽는 순간까지 남겨질 가족 걱정을 하던 자상한 남편.
평생을 '마판 증후군'으로 고통받으며 투병해 온 그는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특별한 날마다 우리 딸과 함께해줄 수 없는 게 제일 미안해.
해마다 아이의 생일이 되면 내 편지를 꼭 전해줬으면 좋겠어'
'우리 딸의 두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아빠가'
'우리 딸의 세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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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딸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아빠가'
그렇게 딸이 성인이 되는 열여덟 번째 생일에서 끝나는 아빠의 편지.
남편은 딸에게 남긴 편지뿐만 아니라
홀로 남아 생계를 책임질 아내를 위해
지인들에게도 편지를 남겼습니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은 제 아내와 딸이
너무 힘들어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힘써주세요.
가족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남편이자 아빠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아내의 나이 스물 둘,
딸은 이제 막 두 살이 되던 그해
남겨질 아내와 딸을 세상에 부탁하며
남편은 그렇게 눈을 감았습니다.
언젠가부터 그 안에 그는 없습니다.
그 안은 가족으로 꽉 채워져 있고,
그들의 행복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보낸 그에게
'여보 괜찮아요'
'아빠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힘이 불끈불끈 솟는 그.
가족이 행복해야 그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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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시간이 될 때까지는 사랑의 깊이를 모른다.
- 칼릴 지브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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