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 김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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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rail2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3회 작성일 22-05-23 00:04본문
나팔꽃
- 목숨의 길에 서서
당신이 목숨을 걸고 왔던 길을 아무런 위험도 없이 왔다
하늘을 날아올라 대륙을 가로질러 가명도 없이 망명도 없이 왔다
하늘까지 길을 막는 분단을 메고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그늘을 끌고
목숨의 길 위에 나팔꽃은 피어 진군 소리 울리는데
우리는 꿀을 사느라 웅성거리며 피의 계곡을 올려다본다
당신이 떠나던 날 조국의 길가에도 나팔꽃이 피었던가
당신이 떠나던 날 아내의 가슴도 저렇게 붉은 보라였던가
해방도 이루지 못하고 독립도 이루지 못하고
계급의 질곡도 타도하지 못하고 못하고 못하고 못하고
꽃 같던 세 살 어린 아들의 손도 다시 잡지 못하고
당신이 쓰러지던 날의 하늘도 저렇게 붉은 보라였던가
동학군으로부터 의병으로부터 삼일 민중으로부터
최시형 전봉준 황현 홍범식 이청천 김구 김좌진 이동휘 홍범도
신돌석 이회영 이육사 윤세주 신채호 진광화 김원봉 그리고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주소도 없고 없고 없고 없고
남길 것 어무것도 없이 흩뿌려진 피도 붉은 보라였던가
당신의 가슴을 뚫고 간 총탄도 저렇게 붉은 보라였던가
나팔꽃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길가에 피어 있는데
나팔꽃은 무장도 없이 저리 짙은 목숨을 피워 올리는데
투쟁의 발길이 지워진 계곡을 새들만 날고 있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조선총독부 만주군관학교
동양척식주식회사 일진회 대정친목회 동민회 국민협회
누구는 살아서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도 이름이 휘황한데
그리고 대를 이어가며 강남을 덮고 의열을 짓밟는데
신흥무관학교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의용군 고려혁명당
경성트로이카 조선공화당 조선민족혁명당 신간회 의열단
누구는 살아서는 부르튼 발로 산천을 헤매고
죽어서는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 구천을 헤매는데
북간도로 만주로 연해주로 상해로 시베리아로 당신이 걷던
목숨의 길에는 지금 무슨 꽃들이 피어 합작을 이야기하는가
민족 해방과 계급 투쟁과 노농연대와 이상 국가를 노래하는가
정든 임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 하던 아낙의 행주치마는
지금 어느 전선의 깃발로 나부끼고 있는가
나팔꽃은 최후의 결전을 독려하듯 붉은 보라로 피어
우리 발걸음을 이끌어간다 이것이 당신의 뜻인가
당신이 이룩한 것은 우리를 불러 광야를 건너게 하는 것
당신이 이룩한 것은 우리를 벼랑 앞에 세우는 것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아 점점 더 붉어지는 가슴으로
당신이 이룩한 것은 팔월의 하늘에 흰 구름을 걸쳐 놓는 것
제국이 물러간 자리에 또 다른 제국이 들어오고
제국이 물러갔지만 제국의 주구들이 다시 점령한 자리
나팔꽃 여린 줄기는 골짜기를 덮고 산을 넘어
압록강을 건너고 대동강 한강을 건너고 파쇼를 넘어
당신이 떠아오던 길을 되돌아 충주로 대전으로
백두대간을 넘어 통곡을 넘어 밀양 감천리에 닿을 것이다
태항산 십자령에서 운두저촌에서 상무촌에서 장자령에서
당신의 시신을 끌고 이국의 민초들이 걸어간 백 리 길에서
이름 없는 것들은 이름 없는 것들끼리 연대하며 살아가듯이
당신의 숨소리가 지층으로 쌓여 있는 오지산 절벽
무너질 듯한 벼랑을 딛고 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다
불의 가득한 산천을 향해 뻗어가는 청산의 손짓
어제는 바람이었으나 내일 하늘을 물들일 나뭇잎이
우리 어깨를 어루만지며 동북쪽으로 나부끼고 있다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인내천에서 통일까지
평등에서 평화까지 당신에서 우리까지
걷는사람 2019 김성장[눈물은 한때 우리가 바다에 살았다는 흔적]
감상평 : 김성장 시인이 지은 위의 시는 나팔꽃의 비유가 참 멋지다
나팔꽃이 나발을 불듯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고 독립하게 된다
비록 남과 북이 서로 다투며 전쟁을 끝마치지 않고 휴전하고 있지만
나팔꽃처럼 보랏빛으로 물든 훗날의 어느 여름에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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