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내리는 눈 / 김진경 > 내가 읽은 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내가 읽은 시

  • HOME
  • 문학가 산책
  • 내가 읽은 시

    (운영자 : 네오)

 

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지상에서 내리는 눈 / 김진경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grail2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60회 작성일 22-06-11 04:37

본문

지상에서 내리는 눈

망각은 또다른 죽음의 시작이다


1

ㅡ나무들은 집시처럼 마음에 드는 주소를 정하고

덕수궁 돌담과 하늘 사이 푸른 머리칼을 날린다.

저 나무들처럼 예의바른 허무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을 기피한다.

나를 지상에 못 박고 있는 슬픈 육체여,

지상에 발붙일 최소한의 주소만 있다면

파란 하늘가에 머리칼을 날리는 나무들처럼

아무 목적 없는 무상의 것에 취하다 떠나리라ㅡ


시청 앞 지하도 입구에 서서

나는 문득 젊은날의 시구절을 떠올린다

눈이 많이 내린다.

지하도 입구에서 조선호텔까지 조선호텔 너머 인왕산까지

폭설의 주먹만한 눈이 하늘이 무너져내린 듯 쏟아져

세상을 덮고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이런 날 나무들은 자기가 못 밖힌 지상을 응시하며 묵상에 잠겨 있다.

하늘이 무너져 지상에 내렸기 때문일까.


2

언제부턴가 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눈사람처럼 머리에 하얗게 눈을 얹은 사람들이

머리와 어깨에 얹힌 눈을 털며 호텔 거피숍을 들어선다.

"돌담이었지 아마?"

노교수는 이제 이방인이 된 나를 돌아보며

희미한 기억의 연결끈을 찾는다.

80년 초여름이었는데

왜 그날 폭설이 내렸던 것처럼 기억되는 걸까.

늦은 저녁 와이셔츠 속에서 유인물을 꺼내

공중전화통에 얹으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 덥석 손을 잡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청계천을 헤매며 구했던 등가기와

눈물을 흘리며 가리방을 긁던 사람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치고

이게 끝인가? 눈 속으로 주먹만한 폭설의 눈이 내렸다.

"죽으려고 그러냐?"
노교수의 걱정스러운 눈, 돌담이었던가? 술을 마셨던가?


3

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70년대 말의 어느 겨울 광주 황금동

돈도 없이 우리는 술을 마셨다.

누가 술값 대신 인질로 잡힐 것인가를 놓고 화투를 쳤다.

절망이 우리들 사이에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주먹만한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

술 따르기에도 노래에도 지친 작부는

아랫도리를 허술하게 드러낸 채 졸고 있었다.

술을 가운데 둔 인질극?

이것도 절망의 한 방식일까?

나는 오줌을 털어내면서 생각했다.

주먹만한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

라디오에서 폭설에 장성 갈재가 막혔다고

갈재는 그만두고 황금동의 골목길도 막혀 있었다.

사람들이 무릎까지 빠지며 골목을 지나갔다.

도립된다는 건 절망을 참 아름답게 만드는군!

나는 생각했다. 화투는 끝나 있었다.

먹구름에 덮인 황금동의 새벽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밤처럼 어둡고

흰 눈에 반사되는 불빛은 아름다웠다.

무릎까지 빠지며 걷다가 벌거벗은 나무 앞에 우리는 멈추었다.

나무는 하늘이 온통 쏟아져 덮힌 지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겨 있었다.

고립된다는 건 절망을 참 아름답게 만드는군!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지상으로의 귀의처럼 떨어져내렸다.

눈물이 한두 방울 우리가 오래도록 머리에 이고 있었던 눈처럼

지상에 쌓인 눈 위로 떨어져내렸다.

"언젠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눈이 내릴 거야.

지상의 모든 것들을 눈에 덮일 거야.

모든 길은 끊어지고

거기서 너는 네가 못 박힌 지상의

한 생을 바라보아야 할 거야."


4

80년 초여름

누군가 구석의 등나무 아래에서 속삭였다

"장성 갈재가 막혔어!."

드디어 큰 눈이 내렸구나! 나는 생각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먹만한 폭설의 눈이 매서운 바람에 쓸려가는 소리가

전화통의 먼 저편에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눈은 참 오래도록 내렸다.

예감처럼 느껴졌던 큰 눈은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눈은 장성 갈재를 넘어 내가 서 있는 교실의 침묵 속으로도

하염없이 쏟아져내려 책상과 아이들과 칠판이 눈 속에 파묻혔다.

눈에 파묻혀 우리는 등사기를 밀었다.

"큰 눈이 내리고 있어!

지상의 모든 것은 눈에 파묻히고

모든 길은 끊어질 거야.

거기서 너는 지상에 못 박힌

너의 한 생을 바라보아야 해!"


5

눈은 끝없이 내리고 있다.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신물로로 오는 사이에

머리칼 위에 눈이 수북히 쌓인다.

겨울 까마귀떼가 저편 하늘의 끝에서 이쪽 하늘의 끝까지

까맣게 떼지어 날아가고 있다.


망월동 묘지에서 담양 벌판의 끝을 향해 우리는 걸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벌판을 그 여자는 줄곧 따라 왔다.

돌아보면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까마귀떼가 날아올라 벌판의 끝

집들이 어두워가는 하늘로 피워올리는 저녁 연기를 향해 날아간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그래, 이제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자유롭게 너를 이야기하겠지.

기다려.

우리는 아니야.

우리는 예의바른 허무주의자일 뿐이지.

아니면 눈이 내리는 동안

자기가 못 박힌 지상을 응시하며 묵상하는 나무일 뿐인지도 몰라."

까마귀떼는 우리 앞에 내려앉았다.

까만 빛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흰 눈은 그 여자가 벗어놓은 하얀 삼베의 옷이었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우리는 울었다.

"우리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생의 한 변방일 뿐이야.

너는 생의 한가운데로 가야만 해.

우리는 아니야."


6

"돌담에 갈까? 아직도 있는지 몰라?"

노교수의 권유를 뿌리치고 눈길을 걸었다.

서울은 눈에 파묻혀 흰 벌판이 되고

까마귀떼가 벌판의 끝을 향해 날아간다.

그 여자는 한사코 내뒤를 따라오고 있다.

까마귀가 내가 걷는 길 앞에 내려앉는다.

까만 빛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그 여자가 벗은 흰 수의가 온 세상을 아름답게 덮는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버려진 생의 한 변방에서.

나를 판 자들은 모두 생의 한 가운데로 떠났어요.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하나요.

지상에 못 박힐 한 아이를 낳고 싶어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지상에 못 박히지 않나요?"
나는 내가 못 박힌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내 머리 위에 쌓인 한 생의 눈이

지상으로의 영원한 귀의처럼 떨어져내렸다.


창비1996 김진경[별빛 속에 잠자다]

감상평 : 김진경 시인의 시는 시어가 뛰어나지는 않다

감성과 이성과 감수성과 지성이 평범한 시인이다

그럼에도 이런 장시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비범하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4,162건 1 페이지
내가 읽은 시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공지 조경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49 1 07-07
416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 0 04-18
4160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3 0 04-17
4159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2 0 04-12
4158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 0 04-07
415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0 0 04-04
415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 0 03-29
415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4 0 03-22
415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9 0 03-18
4153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 0 03-15
415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2 0 03-14
415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7 0 03-08
415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4 0 03-03
4149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20 1 02-18
4148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9 0 02-16
4147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5 0 02-11
4146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4 1 02-04
4145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2 0 02-03
414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8 0 01-29
4143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3 3 01-28
414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1 0 01-26
4141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2 0 01-25
4140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6 1 01-22
4139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1 2 01-20
4138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6 0 01-19
4137 김상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0 1 01-14
413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6 0 01-08
413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5 0 01-03
4134 콩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2 0 12-24
4133 콩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21 0 12-22
413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9 0 12-21
4131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2 0 12-07
413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2 0 12-03
4129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8 0 11-30
4128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9 0 11-23
4127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25 1 11-18
412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9 0 11-17
4125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1 0 11-16
4124 김재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6 0 11-15
4123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5 0 11-15
4122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3 0 11-14
4121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9 1 11-11
4120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3 0 11-10
4119 김재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3 0 11-06
4118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7 0 11-03
4117 선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93 2 10-31
4116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9 2 10-28
4115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7 0 10-23
4114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03 0 10-19
4113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9 0 10-14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