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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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2회 작성일 22-07-02 18:38본문
장미 / 신용목
넝쿨은 연기의 형상으로 피어오른다. 뿌리가 불길의 방향을 그리는 곳에 가득, 어둠이 지펴진 것처럼. 도시가 폐허를 닮은 것처럼. 불꽃은 잔해 속에 깜빡인다. 타다 만 어둠을 헤집고 노는 아이의 흰 막대가 검은 심장을 찔러 그 끝에 꿰고 달려갈 때, 멀리서 엄마, 하고 소리칠 때. 멀리의 엄마, 한 포기 연기여. 가슴 속 텅 빈 심장 자리에 아이를 안을 때. 피는 꽃잎은 지는 낙엽의 빛깔이다, 얼마나 멋진 시작인가. 타는 낙엽은 봉오리 꽃잎의 빛깔이다, 얼마나 멋진 끝인가. 아이가 엄마의 얼굴이 되는 동안 엄마가 아이의 얼굴이 되는 동안, 밤의 아궁이에 환한 넝쿨로 타오르는 어둠의 심장, 화상 자국은 장미를 닮았다. 그러나 달리다 멈춰도 그래도 둥근 바퀴처럼, 떠나도 늘 앞에 있는 도시처럼.
얼띤 感想文
詩를 읽고 感想하는 일은 늘 연기처럼 그려보는 일이다. 詩의 그 뿌리는 詩를 읽는 독자와의 교감 그 끝이므로 그 끝의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그 상황은 어둠이고 폐허고 詩를 깨친다면 불꽃처럼 인식의 단계가 온다. 뿌리는 독자를 은유한 것이며 불길의 방향을 그리는 곳은 독자가 읽게 되는 詩를 은유한 문구다.
타다 만 어둠을 헤집고 노는 아이의 흰 막대와 검은 심장은 대조적이다. 전자는 讀者며 후자는 詩를 대변한다. 흰 막대와 검은 심장의 은유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직 詩를 인식한 단계의 그 첫걸음마 아니 무언가 착상이 오른 상황이라고 표현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이라고 표현했으니까 다음은 아이의 엄마가 나오는 건 글쓰기의 진행과정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엄마는 詩, 완벽한 문장이겠다. 詩人은 이를 멀리의 엄마라고 표현했다.
한 포기 연기여 가슴속 텅 빈 심장 자리에 아이를 안을 때, 이 문구는 독자와 교감을 취한 상황적 묘사다. 참 재밌지 않은가! 피는 꽃잎은 지는 낙엽의 빛깔이다. 詩의 인식과 詩의 출현은 詩의 진화에 가깝다. 그렇지만, 詩가 다른 어떤 괴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문장과 또 다른 詩의 출현을 낳는다.
타는 낙엽은 봉오리 꽃잎의 빛깔이다. 이 표현도 마찬가지다. 방금 장미란 詩를 읽었다면, 습작으로 무언가 하나를 그릴 수 있는 어떤 매개체가 떠올라야겠다. 가령 장미가 아니라, 라일락(색감-보라)을 그린다거나 아카시아(색감-흰,하얀)도 좋겠다. 아니면, 무너진 주식시장을 대변하는 어떤 작품을 그리든가, 필자가 쓴 ‘늪가의 울음’ 같은 것 말이다. 모두 비유를 둔 것들이다. 詩는 모두 比喩다.
아이가 엄마의 얼굴이 되는 동안, 엄마가 아이의 얼굴이 되는 동안, 詩的 交感이다. 詩的 交感은 밤의 아궁이에 환한 넝쿨로 타오르는 어둠의 심장이라고 詩人은 명명했다. 그리고 그 交感의 끝은 화상 자국이며 장미라고 극찬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달리다 멈춰도 그래도 둥근 바퀴처럼, 바퀴의 성질은 굴러간다는 것 구르게 한다는 것 어디론가 또 가게 되어 있고 또 어딘가 멈출지라도 그것은 장미였다. 詩를 떠나 있어도 떠난 게 아니며 늘 앞에 있는 도시처럼 우리는 詩라는 제목으로 티를 내며 사는 存在다. 그러므로 시티(cit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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